선박서 뛰던 HD현대 힘센엔진, 왜 AI 데이터센터가 찾나
입력 2026.08.11 16:06
수정 2026.08.11 16:16
4개월 새 미국 데이터센터서 1.5조원대 수주
가스터빈 공급난 틈새 공략…생산능력 확대 과제
HD현대중공업의 육상 발전용 힘센엔진 ⓒHD현대중공업
선박용 엔진으로 성장한 HD현대중공업의 '힘센(HiMSEN)엔진'이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의 전력 공급원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AI 데이터센터 확대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가운데 전력망 연결 지연과 발전용 가스터빈 공급 부족이 겹치면서 여러 대를 조합해 필요한 발전용량을 구성할 수 있는 중속엔진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어서다. 20여년간 육상발전 시장에서 쌓아온 힘센엔진의 경험이 AI 시대 새로운 수요와 맞물린 셈이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HD현대중공업은 미국 에너지 인프라 개발기업 코반에너지그룹(Corban Energy Group)과 9560억원 규모의 발전설비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9.6메가와트(MW)급 힘센엔진을 기반으로 총 1000MW 규모의 발전설비를 공급하는 사업으로, HD현대중공업이 체결한 발전용 엔진 계약 중 역대 최대다. NH투자증권은 이번 계약으로 2028년부터 2030년 7월까지 9.6MW급 힘센엔진 130기가 공급될 것으로 분석했다. 설비는 미국 현지 빅테크 기업이 운영하는 데이터센터의 전력 공급원으로 쓰일 예정이며 최종 수요처는 공개되지 않았다.
미국 데이터센터 시장에서 대형 계약을 따낸 것은 4개월 만에 두 번째다. 지난 4월에는 미국 에너지 인프라 개발기업 AEG와 20MW급 힘센엔진 33기를 기반으로 한 684MW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금액은 6271억원이다. 두 계약을 합치면 1조5831억원에 달한다.
눈에 띄는 것은 두 계약에 서로 다른 출력대의 힘센엔진이 채택됐다는 점이다. 4월 계약에는 20MW급이 적용된 반면, 이번에는 9.6MW급이 선택됐다. 데이터센터의 규모와 전력 수요에 따라 서로 다른 출력대의 중속엔진을 공급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가스터빈 병목이 열어준 문
데이터센터가 중속엔진에 눈을 돌리는 배경에는 AI가 촉발한 전력 확보 경쟁이 있다. 블룸버그NEF(BNEF)는 미국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가 2035년 194GW까지 늘어 전체 전력 소비의 약 20%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했다. 전력망 연결에 수년이 걸리는 사례가 늘면서 개발사들은 자체 발전설비를 갖추는 온사이트 발전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여기에 가스터빈 공급난이 겹친다. 에너지 전문매체 아거스(Argus)는 주요 제조사들의 생산 적체로 공급 대기기간이 최대 7~8년까지 늘어났다고 전했다. 텍사스에서 마이크로소프트 데이터센터에 전력을 공급할 2.67GW급 프로젝트 '킬비'의 개발사 조율런트(Joulent)는 수년 전 미리 가스터빈 물량을 확보해둔 것이 2028년 가동 일정을 맞추는 데 핵심적이었다고 밝혔다.
이 틈에서 왕복동 방식의 중속엔진이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한 기당 발전용량은 작지만 여러 대를 병렬로 설치해 필요한 용량을 구성할 수 있고 공급 기간도 상대적으로 짧다. WSJ가 인용한 BNEF 집계에 따르면 온사이트 천연가스 발전을 계획하고 일정을 공개한 미국 데이터센터 프로젝트 가운데 약 55%가 가스터빈을, 29%가 왕복엔진을 채택할 계획이다. 다만 이 시장을 먼저 연 곳은 HD현대가 아니다. 핀란드 바르질라(Wärtsilä)가 데이터센터용 중속엔진 시장의 강자로 자리 잡고 있다. DS투자증권은 바르질라의 시장점유율을 60~70% 수준으로 추정하면서, 후발주자인 HD현대중공업은 자체 엔진 지식재산권(IP)을 보유해 해외 원천기술사에 지급하는 로열티 부담이 없다는 점을 경쟁력으로 꼽았다.
힘센엔진의 육상 진출도 최근 일은 아니다. HD현대중공업은 2000년 8월 힘센엔진을 독자 개발한 뒤 이를 기반으로 한 이동식발전설비(PPS)를 해외에 공급해왔다. 특히 쿠바에서는 2005~2008년 여섯 차례에 걸쳐 총 564기(1250MW), 약 7억5000만 달러 규모를 수주했다. 2015년까지 쿠바 전역 32개소에 설치됐으며 2007년에는 쿠바 정부가 발행한 10페소 지폐 뒷면에 해당 발전설비와 '에너지 혁명' 문구가 새겨지기도 했다.
코반에너지 그룹 다니엘 정(Daniel Chung) 대표(왼쪽)와 HD현대중공업 한주석 엔진기계 사업대표가 최근 미국 현지 데이터센터 구축을 위한 발전설비 공급계약 체결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HD현대중공업
엔진 넘어 유지보수로…생산능력은 과제
엔진 판매 이후의 사업도 준비되고 있다. HD현대마린솔루션은 지난 5월 AEG와 미국 데이터센터에 공급되는 힘센엔진 33기에 대해 장기유지보수계약(LTSA)·운영정비계약(O&M) 체결을 추진하는 업무협약(MOU)을 맺었다. 아직 본계약 단계는 아니지만 설치 기반이 늘어날수록 엔진 판매 이후 부품 공급·정비·운영 같은 후속 매출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이를 뒷받침할 생산능력이다. HD현대중공업의 힘센엔진 생산능력은 연간 약 400만 마력, 전력 기준 약 3GW 수준이다. 중속엔진 가동률은 증권사 추정으로 이미 120~140% 수준에 이른다. 회사는 지난 6월 울산사업장 내 힘센엔진 공장 증축 공사에 착수했고, 이와 별도로 생산능력 확대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한국투자증권은 이번 코반·AEG 계약과 선박용 고정 물량을 함께 계산하면 HD현대중공업이 2030년까지 활용할 수 있는 중속엔진 생산 슬롯이 사실상 소진돼 증설에 나설 것으로 분석했다. 데이터센터향 신규 수요가 본격적으로 늘어나는 만큼 생산능력을 얼마나 빠르게 확충하느냐가 향후 추가 수주와 매출 확대를 좌우할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