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주 재판, 법정은 무대가 아니다 [초점]
입력 2026.08.29 12:06
수정 2026.08.29 12:06
"국민참여재판, 피해자 보호 못하는 구조적 한계" 인정하더니...
"뮤지컬 해도 된다"는 판사...웃음거리 된 성폭력 피해
방어권과 피해자 보호, 균형 잃은 사법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9부(부장판사 엄기표)가 제자를 성폭행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뮤지컬 배우 남경주의 사건을 국민참여재판으로 회부했다. 지난 26일 열린 첫 공판준비기일에서 피고인 측의 신청을 받아들인 결정이다. 애초 형사13단독에 배당됐던 사건은 쟁점의 중대성을 고려한 재정합의를 거쳐 판사 3명이 함께 심리하는 합의부로 재배당됐고, 본 재판은 오는 11월 27일과 30일 이틀간 진행될 예정이다.
문제는 재판 절차와 공판 방식을 조율하는 공판준비기일 막바지에 불거졌다. 재판장은 양측에 배심원 설득 절차를 설명하며, 상대방에 대한 모욕이나 비난, 위협 수준이 아니라면 어떤 방식의 진술이든 폭넓게 허용하겠다는 취지로 말한 뒤 “본인들 전공을 살려 뮤지컬을 해도 충분히 괜찮다”는 발언을 내놓았다. 남경주 측 법률대리인은 웃음을 터뜨렸고, 피해자 측 변호인은 “뮤지컬은 언급될 부분이 아니”라며 있는 그대로 진술하겠다는 뜻을 즉각 밝혔다. 법정 안에서 벌어진 이 대비되는 반응 자체가, 재판장의 가벼운 비유가 어느 쪽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발언이 나온 맥락에 있다. 재판부는 불과 몇 분 전, 국민참여재판 채택 여부를 결정하면서 이 제도 자체가 성폭력 피해자를 완벽하게 보호하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했다. 그럼에도 피고인에게는 일생을 건 재판이라는 점을 고려해 피고인 측 신청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고, 피해자가 피고인과 마주치지 않도록 가림막을 설치하거나 필요하면 피고인을 퇴정시킬 수도 있다는 보완책까지 함께 언급했다. 자신이 직접 짚은 제도적 위험을 인지한 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그 위험을 키울 수 있는 발언을 내놓은 셈이다.
뮤지컬 배우 남경주 ⓒ데일리안 DB
이번 사건의 죄명은 피감독자간음으로, 피고인과 피해자 사이에 보호·감독 관계가 성립하는지, 그 관계에서 비롯한 위력이 실제로 행사됐는지가 법정에서 다퉈진다. 피해자 측은 피고인이 범행 사실을 인정하는 취지로 보낸 사죄의 메시지를 증거로 제출하겠다고 밝힌 상태이며, 피고인 측은 반대로 보호·감독 관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데 변론을 집중하겠다는 입장이다. 양측의 공방이 그만큼 첨예하다.
피해자는 일상을 잃고 신원 노출과 2차 피해의 공포를 감수하며 법정에 선다. 이러한 엄중한 자리에서 피고인의 직업을 빗대 ‘뮤지컬’을 언급한 것은 사안의 무게를 가볍게 치부하고 사건을 희화화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2022년 ‘2차 피해 야기’를 성범죄 가중처벌 요건으로 편입시켜, 피해자에게 모욕감을 주거나 신상을 노출하는 등 2차 피해를 유발한 경우 집행유예 대신 실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했다. 헌법재판소 역시 미성년 피해자에 대한 반대신문권 제한의 근거로 2차 피해 방지 목적을 들며, 반대신문이 피해자의 성품이나 평소 행동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는 방식으로 이뤄질 경우 수치심과 공포 등 2차 피해만을 낳을 수 있다고 지적해왔다. 2차 피해가 결코 사소한 부수적 문제가 아니라는 사법부 스스로의 판단인 셈이며, 가해자의 언행뿐 아니라 재판부의 언행 또한 이 원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형사소송에서 헌법상 권리인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은 필수적이다. 국민참여재판 회부 역시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다. 그러나 그 방어권이 피해자의 인격권을 침해하거나 사법적 보호를 무력화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하는 것만큼, 피해자가 왜곡된 시선이나 부당한 압박 없이 안전하게 진술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것 역시 사법부의 헌법적·법률적 기본 책무다.
특히 성폭력 사건의 국민참여재판은 피해자 보호 관점에서 매우 민감한 절차다. 일반 시민으로 구성된 배심원 다수 앞에서 피해 사실이 공개적으로 다뤄지고 반대신문을 견뎌야 하는 피해자의 심리적 부담은 극에 달한다. 이 때문에 법원 안팎에서도 성범죄 사건에 국민참여재판을 적용할 때 배심원을 상대로 한 별도의 지침이나 유의사항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그럼에도 재판장이 ‘뮤지컬 허용’이라는 경솔한 비유를 든 것은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심원을 상대로 한 변론이 지켜야 할 원칙과 어긋난다. 변론은 철저히 객관적 증거와 논리적 법리에 근거해야지, 대중의 감정을 자극하거나 극적 연출에 기대어서는 안 된다.
재판부의 언행은 자칫 법정이 자극적인 쇼나 연기 대결의 장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왜곡된 신호를 주며, 진실을 증언해야 하는 피해자에게 심리적 위축을 안길 위험이 있다. 국민참여재판은 연기력을 겨루는 오디션장이 아니고, 법정은 감정적 연출을 펼치는 무대가 아니다. 피고인의 방어권과 피해자 보호라는 형사사법의 두 축이 균형을 잃는 순간 사법 정의는 무너진다. 재판부는 법봉의 무게를 다시 인식하고, 향후 본 공판에서 철저한 피해자 보호와 엄격한 증거재판주의를 통해 이미 흔들린 사법 신뢰를 바로잡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