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입에서 나온 '북핵 57개'…우리 정부 비핵화 기조 깨지나
美 트럼프 "김정은, 57개 매우 강력한 핵무기 갖고 있다"
'김정은과의 관계 재개 목표가 비핵화' 질문에 즉답 피해
"한반도 비핵화, 포기보다 중장기적 목표로 보고 간다는 것"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3일(현지 시간) 워싱턴에서 열린 인디카 '프리덤 250 그랑프리' 자동차 경주에서 출발 신호인 녹색 깃발을 흔들고 있다. ⓒ뉴시스
트럼프발 '한반도 핵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그동안 쉬쉬해왔던 북한의 핵 보유 현황에 대해 구체적인 숫자를 거론한 이후 우리 정부에서도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자체 핵무장'을 거론하고 있다.
발단은 역시나 트럼프 대통령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9일(현지시간) 백악관 행사에서 "그(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는 57개의 매우 강력한 핵무기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대통령의 입에서 북한의 핵무기 보유량이 나온 건 처음 있는 일이다. 그동안 북한의 핵 무기 보유 현황은 국제연구기관 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추정해왔다.
SIPRI(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와 FAS(미국과학자연맹)가 대표적이다. 북한의 핵 개발 정보는 기밀 사안으로, 한미는 정보력을 노출할 수 있다는 우려 하에 구체적인 숫자에 대한 언급을 꺼려왔다. 우리 군 당국은 '2022 국방백서'에서 '핵분야'라는 표현과 함께 "핵물질을 생산해왔으며, 플루토늄 70여㎏, 고농축 우라늄(HEU) 상당량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고 서술한 게 전부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갑작스런 "핵무기 57개" 발언은 구체적이고 분명했다. 뒤이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더 큰 혼란을 가져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과의 관계를 재개하려는 목표가 여전히 비핵화인가'라는 질문에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며 즉답을 피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단지 "나는 김정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만 했다.
이를 두고 미국이 북한을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려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뒤따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북한이 바라왔던 '한미 연합훈련 축소'와 함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할 수도 있다는 내심을 내비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 과정에서 우리 정부와의 사전 교감은 없었던 것으로 파악되면서 '페이스메이커'를 자처한 우리나라가 '패싱'됐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돌발변수'인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 이후 우리 정부는 흔들리는 모습이다. 안규백 국방부 장관은 지난 20일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해 북한의 핵무기 보유량을 묻는 질의에 "80~120개 정도로 본다"고 답변했다. 안 장관은 이후 "국내 연구기관의 평가 내용"이라고 해명했지만, 그동안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핵무기 등 군사기밀에 대해서는 'NCND(Neither Confirm Nor Deny)'해왔던 기존 관례와 비교하면 매우 이례적인 답변이다.
다만 안 장관은 '북한이 핵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에 "그것은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안 장관은 "우리는 핵을 개발할 수 없다. 미국의 전술핵(배치)도 우리가 받아들이면 안 된다"며 '한반도 비핵화' 입장도 명확히 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지난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업무보고를 하고 있다. ⓒ뉴시스
통일부도 '한반도 비핵화' 기조를 견지했지만, 현실적으로 '북한의 핵무기 보유'에 대해서는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통일부 고위 당국자는 지난 21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북한의 핵 능력은 매일 증강·고도화되는데 비핵화를 말한다고 되겠느냐"라며 "'질주하는 '핵 자동차'를 일단 멈춰야 후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보유라는 현실에 초점을 맞춰 이를 인정하지만, 이 역시 '한반도 비핵화'로 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 관계자는 "북한이 핵을 갖고 있는 건 현실"이라면서도 "미국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지정하고 명명할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당장 '한반도 비핵화'와 연결지어 해석하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미국이 북한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 정부를 '패싱'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지만, 이는 미국 내에서도 반대하는 목소리가 큰 만큼 실제 이뤄지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인 트레드 플라이츠 미국우선주의정책연구소 부소장은 미 보수매체 '아미리칸 그레이트니스'에 낸 기고문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을 만나기에 앞서 이재명 대통령과 회담해야 하며, 가급적 서울을 방문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플라이츠 부소장은 그러면서 "대통령의 한국 방문은 한미관계에 대한 의지와 김정은과의 대면 외교를 재개하겠다는 결의를 강력히 전달할 것"이라면서 "2018년에 했듯이 한국 국회에서 또 다른 주요 연설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신범철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비핵화 부분과 관련해 언급하지 않은 건 미국이 한반도 비핵화 기조를 당장 포기했다기보다는 중장기적인 목표로 보고 간다는 것"이라며 "일단은 북한이 도발을 하지 않도록 막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접근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신 수석연구위원은 "트럼프 대통령도 '굿 딜(Good Deal)', '배드 딜(Bad Deal)'을 생각하기 때문에 (한반도 비핵화와 관련해) 손해보는 장사는 안하려고 할 것"이라며 "우리 정부는 한미 공조를 통해 북한 문제를 접근해야 한다"고 전했다.
트럼프 발언 이후 정치권에서는 '자체 핵무장'에 군불을 떼고 있다.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은 페이스북에서 "비핵화 없는 북미 거래는 평화가 아니다"라며 "대한민국의 생존을 지킬 가장 현실적이고 강력한 대안은 자체 핵무장"이라고 주장했다.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도 SNS를 통해 "이제는 대한민국의 자위적 핵무장에 대한 국가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밝혔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북핵을 압도하는 핵 독트린, 핵무장 프로젝트'"라며 핵 공유와 우라늄 농축·사용후핵연료 재처리 권한, 핵추진 잠수함 확보 등을 제안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