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시간 풀면 반도체 빨라지나”…R&D 속도전의 조건[메가특구법 진통 ③]
입력 2026.08.14 07:00
수정 2026.08.14 07:00
근로시간 한도에 고객사 인증·양산 지연 우려
6개월 신청 4건…기여도 따른 보상·승진 과제
ChatGPT로 생성한 이미지. ⓒChatGPT
반도체 메가특구 추진을 계기로 연구개발(R&D) 인력의 주 52시간 규제 완화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특히 최선단 공정은 개발과 수율 안정화가 몰리는 시기에 핵심 인력의 집중근무가 필요하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정부도 근로시간 유연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하지만 기술개발 기여도가 보상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 구조에서는 규제를 풀어도 연구자의 자발적인 추가 근무를 끌어내기 어렵다는 우려가 나온다.
13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정부는 호남권 반도체, 충청권 첨단산업, 영남권 피지컬 인공지능(AI) 육성을 골자로 한 3대 메가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할 ‘메가특구특별법’은 연내 제정할 계획이다.
특별법 논의에서는 반도체 등 첨단산업 R&D 인력의 주 52시간 규제를 완화하는 노동특례가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선택적 근로시간제 정산기간을 최대 6개월로 늘리거나 ‘화이트칼라 이그젬션’(고소득 전문직 근로시간 규제 적용 제외 제도)을 도입하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공정개발·수율 안정화는 ‘시간 싸움’…집중근무 필요
반도체 R&D는 새로운 공정을 개발하는 단계와 생산량·수율을 끌어올리는 램프업(ramp-up) 단계에 업무가 집중된다. 시험과 결과 분석, 공정 조건 변경을 반복해야 하고 해당 공정을 설계한 연구자가 축적된 데이터를 토대로 후속 분석까지 맡는 경우가 많다. 업계가 근로시간 유연화를 요구하는 이유다.
한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새로운 팹에 기존 공정을 적용하더라도 장비와 현장 조건이 달라 테스트를 반복해야 한다”며 “공정 조건을 입력한 연구자가 결과까지 분석해야 해 일부 핵심 인력의 집중근무가 필요한 시점이 생긴다”고 말했다.
근로시간 한도에 걸리면 연구를 중단하거나 다른 인력에게 넘겨야 해 공정개발과 고객사 인증, 양산 일정이 늦어질 수 있다. 최선단 공정은 양산 시점이 시장 선점과 직결되는 만큼 속도가 핵심 경쟁력이라는 게 업계 설명이다.
지난 12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2029년도 늦다”며 반도체 투자 일정 단축을 강조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52시간 적응한 반도체 현장…“예외는 최선단 R&D부터”
정부가 근로시간 유연화를 검토하고 업계도 필요성을 강조하지만, 주 52시간제에 이미 적응한 현장 분위기가 복병으로 꼽힌다. 초과근무를 전제로 한 업무 방식이 상당 부분 사라진 데다 젊은 연구자들도 장시간 근무를 꺼려 특례 활용도가 제한적일 수 있다는 평가다.
또 다른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주 52시간을 넘겨 일하는 조직 자체가 많이 줄었고 대부분 직원도 현재 근무 방식에 적응했다”며 “예외가 필요하다면 차세대 D램 공정을 개발하는 최선단 태스크포스(TF) 등 일부 R&D 조직에 한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6개월 특별연장근로 수요가 제한적이라는 점은 기존 제도의 활용 실적에서도 드러난다. 전 정부 당시 추진된 반도체 R&D 인력의 주 52시간 적용 제외는 장시간 노동을 조장한다는 야당과 노동계의 반대에 막혔다. 이후 특별연장근로 1회 인가기간을 최대 6개월까지 선택할 수 있도록 확대했지만 해당 신청은 4건에 그쳤다.
노동부가 광범위한 특례 도입에 신중한 이유다. 별도 특례를 도입하더라도 기존 제도로 대응하기 어려운 업무와 핵심 인력으로 범위를 좁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적용 효과는 메가특구의 사업 단계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다.
업계에서는 호남권 신규 팹이 최선단 기술개발 거점이라기보다 검증된 공정을 새 생산라인에 적용하는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고 있다. 초기 장비 셋업과 수율 안정화에는 R&D 인력의 집중 투입이 필요하지만 최선단 기술개발 조직과는 업무 특성과 근로시간 수요가 다르다는 설명이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학과 교수는 “R&D 전체에 장시간 근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며 “고객사 개발 일정과 맞물려 업무가 집중되는 시기에 핵심 인력만 제한적으로 활용하면 된다”고 말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군 공항 인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산단 예정 부지. ⓒ뉴시스
근로시간 풀어도 보상 그대로면 무용지물…“야근하면 바보”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반도체 경쟁을 ‘전격전’으로 규정하며 속도를 강조했다. 하지만 근로시간 규제 완화가 실제 R&D 인력의 추가 근무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성과급은 회사와 사업부 실적을 중심으로 산정된다. 개인평가에 따른 차이는 있지만 기술개발 기여도에 따른 보상 격차는 제한적이라는 평가다. 연구 성과를 내도 동료와 보상이 비슷하다면 추가 근무를 선택할 유인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병훈 포항공대 전자전기공학과 교수는 “가령 직원들이 회사 실적에 따라 6억원씩 받고 밤새 연구한 사람이 2억원을 더 받는 데 그친다면 추가 근무를 하지 않는 편이 합리적일 수 있다”며 “현재 보상체계에서는 역량 있는 연구자조차 추가 근무에 나설 유인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국에서는 핵심 연구자 간 연봉이 수십 배 차이 나는 사례도 있다”며 “보상 격차가 큰 만큼 연구자들이 성과를 내기 위해 몰입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금전적 보상뿐 아니라 연구 성과를 임원 승진으로 연결하는 인사체계도 연구자의 동기부여 수단으로 꼽힌다.
리사 수 AMD 최고경영자는 IBM 반도체 R&D센터 부사장과 프리스케일반도체 최고기술책임자를 거쳐 2012년 AMD에 합류했다. 이후 2014년 최고경영자에 올랐다.
이 교수는 “근로시간 유연화가 실효성을 가지려면 월 수만원의 특근비가 아니라 기술개발 성과에 따른 파격적인 보상과 승진이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