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카카오톡
블로그
페이스북
X
주소복사

20년 전 책장에서 만난 모험…‘오디세이’ 찾은 ‘홍은영 키즈’ [영화 뷰]

전지원 기자 (jiwonline@dailian.co.kr)
입력 2026.08.11 14:10
수정 2026.08.11 14:10

트로이 목마·키클롭스·세이렌…어린 시절 익힌 신화가 스크린으로

트로이 전쟁 10년, 고향으로 돌아가는 데 다시 10년. 수많은 신과 영웅이 얽히고 외눈박이 거인과 마법사, 바다 괴물이 차례로 등장하는 ‘오디세이아’는 3000년 가까이 전해진 대서사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 역시 172분 동안 이 긴 모험을 펼쳐낸다.


그럼에도 현재 20대 후반과 30대에게 트로이 목마와 키클롭스, 키르케와 세이렌은 익숙한 이름이다. 이들은 2000년대 초 홍은영 작가가 그린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 자란 이른바 ‘홍은영 키즈’이기 때문이다.


‘오디세이’ 스틸컷 ⓒ유니버설 픽쳐스

11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오디세이’는 전날 25만 7625명을 동원해 개봉 이후 6일 연속 박스오피스 정상을 지켰다. 누적 관객 수는 213만 2446명이다. 그중 20·30대의 관심이 눈에 띈다. CGV가 제공한 지난 10일 기준 연령별 예매 분포를 보면 20대가 22%, 30대가 25%로 두 연령층이 47%를 차지했다. 30대는 전체 연령대 가운데 가장 높은 비중을 보였다.


극장 관람이 줄어든 환경에서 거둔 성과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영화진흥위원회와 한국생산성본부가 지난 2월 발표한 ‘영화콘텐츠 소비트렌드 연구’는 2025년 10월 2일부터 16일까지 전국 만 14~69세 영화 소비자 3000명을 온라인으로 조사했다. 최근 1년간 극장을 찾은 응답자 2237명 가운데 45.8%는 직전 1년보다 극장 관람 빈도가 줄었다고 답했다. 관객들이 볼 영화를 선별하는 상황에서 172분 길이의 고전 서사에 젊은 관객이 움직였다.


흥행을 이끄는 힘은 여러 갈래다. ‘오펜하이머’ 이후 3년 만에 돌아온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이라는 점과 영화 전체를 아이맥스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규모, 맷 데이먼·톰 홀랜드·앤 해서웨이·젠데이아 등 출연진이 관람 기대를 높였다. 여기에 20·30대가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신화에 대한 친숙함이 긴 이야기 속 인물과 사건을 따라가는 바탕이 됐다.


홍은영 작가가 그림을 맡은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는 2000년 11월 1권이 출간돼 2003년 12월 18권까지 이어졌다. 2003년 1월 셋째 주에는 14권 ‘트로이의 목마’가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2위에 올랐다. 같은 해 1월 주니어네이버 그리스·로마 신화 사이트에는 어린이들이 제우스와 헤라 등을 주인공으로 쓴 콩트와 동화, 소설 약 5800건이 올라왔다. 5월에는 관련 사이트의 회원이 40만명을 넘었고 이용자가 만든 커뮤니티도 2519개에 달했다.


이재민 만화문화연구소 소장은 당시 출판만화 시장의 변화가 학습만화의 질을 끌어올렸다고 분석했다. 이 소장은 “2000년대 초중반 출판만화 시장이 어려워지면서 실력 있는 젊은 작가들이 상대적으로 판로가 열려 있던 학습만화로 이동했고, 그 과정에서 작품의 질이 크게 높아졌다”며 “홍은영 작가의 그림은 당시에도 높은 완성도를 갖췄다”고 말했다.


이어 “아이들이 흥미를 느낄 이야기와 높은 수준의 작화가 결합됐고, 학습만화라는 형식 덕분에 학교와 도서관에도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부모들도 교육 콘텐츠로 받아들이면서 반복해서 읽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며 “인터넷의 등장으로 각자 보는 콘텐츠가 많아진 세대에게 학교에서 함께 볼 수 있던 작품은 드물었다. 그중 ‘그리스 로마 신화’가 또래 대부분이 공유하는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고 설명했다.



‘오디세이’ 스틸컷 ⓒ유니버설 픽쳐스

특히 영화가 다루는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는 홍은영판의 후반부를 길게 차지한다. 14권 ‘트로이의 목마’에서 시작된 트로이 함락과 귀향 서사는 18권 ‘오, 이타카, 이타카!’까지 이어진다.


놀란 감독의 영화도 트로이 목마와 폴리페모스의 동굴, 키르케와 세이렌, 칼립소의 섬과 구혼자들이 차지한 이타카를 주요 장면으로 옮겼다. 홍은영판을 읽은 관객에게 영화는 어린 시절 머릿속으로 그렸던 모험의 크기와 소리를 확인하는 경험이 된다.


20대 중반 관객 김현서·한승희 씨는 어린 시절 홍은영 작가의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은 ‘홍은영 키즈’다. 두 사람은 만화를 통해 내용을 먼저 익힌 덕분에 긴 서사를 흥미롭게 따라갈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만화에서 보던 세이렌과 칼립소 여신 등의 장면을 잘 구현한 것 같다”며 “제작비를 많이 들인 티가 나 재미있게 봤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어린 시절 편하게 접하고 좋아했던 콘텐츠는 성인이 돼 다시 만났을 때 거부감이 적다”며 “20·30대에게도 자신이 좋아했던 콘텐츠가 리바이벌되거나 신작으로 돌아오는 시기가 온 것”이라고 말했다.


놀란 감독과 아이맥스의 규모가 관객을 극장으로 이끌었다면, 홍은영판은 20·30대가 긴 고전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미리 닦아놓았다. 책을 읽던 어린이에게 오디세우스는 괴물과 신의 방해를 이겨내는 모험가였다. 성인이 된 독자는 같은 이야기에서 전쟁으로 20년을 잃고도 가족에게 돌아가려는 한 인간의 고뇌를 이해하게 됐다. 어린 시절의 독서 경험이 새로운 기술과 해석을 만나 성인의 극장 소비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전지원 기자 (jiwonline@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댓글 0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