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가 싫은 게 아니다’ 상암벌 5만 팬들이 축협에 던진 메시지
입력 2026.08.10 08:46
수정 2026.08.10 08:46
쿠팡플레이 시리즈 보기 위해 5만 넘는 관중 찾아
한국 축구도 정상화 되면 구름 관중 되돌아 올 수 있어
축구가 싫어진 게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축구 열기는 여전히 뜨거웠고, 정상적인 축구에 목이 말라 있을 뿐이었다.
9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26 쿠팡플레이 시리즈' 2경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맨체스터 시티의 맞대결. 킥오프 수 시간 전부터 상암벌 일대는 붉은색과 하늘색 유니폼을 입은 관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팬들의 얼굴에는 설렘과 기대감이 가득했다. 무더위마저 한풀 꺾인 일요일 밤, 5만여 관중이 뿜어내는 함성은 경기장 지붕을 뚫을 기세였다. 치열한 티켓팅을 뚫고 경기장을 찾은 팬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들이 펼치는 90분간의 열전에 환호했고, 멋진 플레이가 나올 때마다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특히 이강인이 후반 등장하자 분위기는 더 고무됐다.
이날 상암벌을 가득 채운 팬들의 축구 열기는 최근 대한민국 축구계가 처한 씁쓸한 현실과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축구계에서는 ‘한국 축구의 열기가 식었다’, ‘팬들의 관심이 예전만 못하다’는 개탄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쿠팡플레이 시리즈에서 드러난 현실은 달랐다. 팬들의 축구를 향한 사랑과 열정은 단 한 순간도 식은 적이 없었다.
맨체스터 시티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경기를 보기 위해 5만여 관중이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찾았다. ⓒ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월드컵 졸전부터 성접대 파문까지…바닥 친 축구협회 신뢰도
최근 한국 축구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에 놓여있다.
홍명보 전 감독 선임 때부터 불거진 불통과 졸속 행정은 여론이 등을 돌리는 시발점이었고, 2026 북중미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참담한 경기력을 선보이자 성난 여론에 불이 붙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0여 년 전 해외 심판을 상대로 한 성접대 파문까지 뒤늦게 수면 위로 떠오르며 축구계는 거센 후폭풍에 휩싸이는 중이다. 과거의 비리와 도덕적 해이까지 재조명되면서 축구협회의 위상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정몽규 전 회장을 향한 악화된 여론과 홍명보 전 감독에 대한 불신은 이미 월드컵 전부터 수면 위로 드러난 상태였다. 홍명보호 출범 전만 해도 A매치가 열리면 티켓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으나 부임 이후에는 계속해서 빈자리가 늘어갔다. 급기야 경기장에는 ‘정몽규 나가’, ‘홍명보 아웃’이라는 걸개가 걸릴 정도였다.
비공식 입단식을 치른 이강인. ⓒ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상암을 가득 채운 인파…팬들은 '진짜 축구'에 목말랐다
축구팬들은 이번 쿠팡플레이 시리즈를 통해 대표팀 경기장을 찾지 않는 이유를 가감 없이 보여줬다. 팬들이 돌아선 것은 축구 그 자체가 아닌, 정상적이지 않은 한국 축구였다.
비단 올해뿐 아니라 매년 8월 쿠팡플레이 시리즈가 열리면 티켓 예매 전쟁이 펼쳐진다. 경기장을 찾은 팬들은 만만치 않은 가격의 유니폼까지 구매하며 열정적인 축구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슈퍼스타들의 화려한 플레이와 명감독들의 지략 싸움에 팬들은 열광한다. 이강인의 새로운 출발을 응원하는 팬이 있었고, 세계적인 선수들을 직접 보고 싶은 팬도 있었다. 어린 자녀의 손을 잡고 경기장을 찾은 가족도 있었고, 오랜만에 친구들과 축구장 나들이에 나선 팬들도 있었다. 90분 내내 터져 나온 박수와 함성은 팬들이 얼마나 축구를 갈망해 왔는지를 그대로 입증했다.
전반전이 끝나고 현장에서 만난 한 축구 팬은 "최근 대표팀 경기를 볼 때는 답답하고 화만 났는데, 오늘 경기를 보면서 정말 축구 자체를 즐길 수 있었다"며 "우리가 원하는 것은 상식적인 축구다. 그것만 갖춰진다면 왜 대표팀 경기장을 찾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축구팬들은 수준 높은 경기에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정상적 행정과 경기력 회복…축구협회가 답해야 할 시간
공은 다시 대한축구협회로 넘어왔다. 이번 쿠팡플레이 시리즈는 한국 축구팬들의 열정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고, 언제든 다시 경기장을 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대한축구협회가 실추된 신뢰를 회복하고 다시 팬들을 A매치 경기장으로 불러 모으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필수적이다. 투명하고 공정한 행정 시스템을 구축하고, 밀실 행정과 독단적 의사결정 구조를 완전히 청산해야 한다. 과거의 문제점을 벗겨내는 철저한 자정과 쇄신만이 팬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팬들은 축구를 버리지 않았다. 단지 정상적인 축구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상암벌을 가득 채운 5만 함성은 축구협회를 향해 마지막으로 보내는 엄중한 경고이자 희망의 메시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