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위 윈터부터 ‘레모네이드’ 캔까지…에스파, 디테일로 채운 고척돔 [현장]
입력 2026.08.08 22:37
수정 2026.08.08 22:44
블랙핑크 이어 걸그룹 두 번째 고척돔 입성·4세대 걸그룹 최초
솔로·유닛 무대까지 확장…음향 울림·돌출 활용은 아쉬움 남겨
첫 고척돔 입성이라는 말이 무색했다. 에스파(aespa)는 자신들이 가장 잘해온 강렬한 음악과 세계관, 솔로와 유닛 무대를 촘촘하게 배치하며 거대한 공간을 채웠다. 고척돔 특유의 음향과 동선에서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무대의 밀도만큼은 이전 콘서트에서 따라붙었던 일부 불호 평가를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에스파 ⓒSM엔터테인먼트
에스파는 8일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2026-27 aespa LIVE TOUR - SYNK : COMPLaeXITY’를 열고 팬들과 만났다. 이번 공연은 에스파의 첫 고척돔 입성으로, 블랙핑크(BLACKPINK)에 이어 걸그룹으로서는 두 번째이자 2020년 이후 데뷔한 4세대 걸그룹 가운데 처음이라는 점에서도 상징성이 컸다.
공연 초반부터 팀의 강한 색을 밀어붙였다. 블랙 계열 의상을 입고 최신곡 ‘레모네이드’(LEMONADE)를 시작으로 ‘위플래시’(Whiplash), ‘블랙 맘바’(Black Mamba), ‘WDA’(Whole Different Animal)를 연달아 선보였다. 이후 ‘떨스티’(Thirsty), ‘엔젤 #48’(Angel #48)에서는 화이트 계열 의상으로 갈아입고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미니 6집 ‘리치 맨’(Rich Man) 수록곡 ‘카운트 온 미’(Count On Me)에서는 세밀한 연출이 돋보였다. 카리나가 피아노 연주를 시작한 뒤 피아노 본네트에 누워 있던 윈터가 다음 파트를 이어받았다. 무대와 거리가 먼 고척돔에서는 전광판의 역할이 큰데, 화면에 윈터가 잡히는 순간 큰 환호가 터지며 장면의 효과를 더했다.
에스파는 ‘레모네이드’ 콘셉트를 이동 장치까지 확장했다. 멤버들은 일반적인 토롯코(이동차) 대신 빨대가 꽂힌 탄산음료 캔 모양의 구조물에 한 명씩 올라 공연장을 돌았다. ⓒSM엔터테인먼트
‘레모네이드’ 콘셉트를 이동 장치까지 확장했다. 멤버들은 일반적인 토롯코(이동차) 대신 빨대가 꽂힌 탄산음료 캔 모양의 구조물에 한 명씩 올라 공연장을 돌았다. 이동수단에도 이번 공연의 콘셉트를 녹여낸 점이 눈에 띄었다.
공연은 멘트를 과감하게 줄였다. 첫 멘트는 시작 후 약 40분이 지나서야 나왔고, 이후에도 앵콜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무대로 채웠다. 형식적인 토크를 길게 이어가기보다 공연의 흐름과 밀도를 유지한 선택이 효과적이었다.
에스파 콘서트의 또 다른 기대 요소인 솔로 무대는 이번에도 이어졌고, 처음으로 유닛 무대까지 더해졌다. 지젤과 닝닝은 ‘롤리팝’(Lollipop), 카리나와 윈터는 ‘세레나데’(Serenade)를 선보이며 조합을 넓혔다. 다만 고척돔 특유의 울림 때문에 처음 듣는 미공개곡에서는 가사와 보컬이 또렷하게 전달되지 않는 아쉬움이 컸다.
솔로 무대에서는 기존 이미지와 다른 선택이 두드러졌다. 카리나는 ‘16비트’(16Bit)로 이전의 파워풀한 솔로곡과 달리 느린 템포를 택했고, 윈터는 ‘새들 업’(Saddle Up)으로 묵직한 댄스곡을 소화하며 작은 체구를 잊게 하는 힘 있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에스파 닝닝 ⓒSM엔터테인먼트
지젤은 ‘바이비포헬로’(BYEB4HELLO)로 자신의 감각적인 음악 취향을 살렸고, 닝닝의 ‘아이 러브 유 벗 아이 갓어 렛 유 고’(I Love You But I Gotta Let You Go)는 오케스트라와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해 솔로 무대 가운데 가장 선명한 감정선을 남겼다.
공연 중간 VCR은 한동안 흐릿해졌던 에스파의 세계관을 다시 정리하는 영상이었다. 데뷔 초 ‘광야’ 시절의 ae와 P.O.S를 떠올리게 하는 영상에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내레이션이 얹히며 이질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특히 데뷔 초부터의 시간을 연결한 영상 끝에 에스파의 깃발이 바닥에 쓰러지고, 이를 ae로 추정되는 존재가 밟고 지나간 뒤 록 버전으로 편곡된 ‘아마겟돈’(Armageddon)이 시작되는 흐름은 강렬했다. 댄서들이 에스파의 깃발을 흔드는 장면까지 이어지며 VCR과 실제 무대를 하나의 서사로 연결했다.
그러나 팬들 사이에서 꾸준히 호불호가 갈렸던 댄서들의 인터루드는 이번에도 등장했다. ‘드라마’(Drama)와 ‘넥스트 레벨’(Next Level) 사이에 별도의 댄서 퍼포먼스가 배치됐는데, 이미 세계관을 담은 VCR을 충분히 활용한 상황에서 멤버들이 빠진 구간이 다시 길어지며 공연 흐름을 끊는다는 인상을 남겼다.
무대 구조도 장단점이 있었다. 번개 모양으로 길게 뻗은 돌출 무대는 시각적으로 에스파의 이미지와 잘 어울렸지만, 멤버들이 특정 구간에 오래 머물거나 관객과 직접 교감하는 연출은 많지 않았다. 잘 만든 구조에 비해 돌출 무대가 가진 실질적인 장점을 충분히 활용하지는 못했다.
에스파 ⓒSM엔터테인먼트
반면 전광판과 레이저, 조명 연출은 넓은 공간의 약점을 상당 부분 상쇄했다. 때로는 잘 만든 무대를 하나씩 나열해 보는 듯한 인상도 있었지만, 곡의 힘과 멤버들의 실력, 연출 완성도가 보완했다.
무엇보다 이번 공연은 걸그룹이 대형 공연장을 채우기 어렵다는 편견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데뷔부터 묵직한 사운드와 광야 세계관을 구축해온 에스파의 음악은 오히려 고척돔의 규모와 잘 맞았다. 강한 퍼포먼스뿐 아니라 느린 곡에서도 공간을 장악하는 가창력이 더해지며 공연장의 크기가 팀의 약점보다 강점을 부각시켰다.
첫 고척돔에서 에스파가 보여준 것은 규모의 성장만이 아니었다. 데뷔 초 세계관을 다시 불러오고, 솔로에서 유닛으로 무대를 확장했으며, 멘트를 줄인 자리를 공연으로 빼곡히 채웠다. 음향과 동선, 일부 무대에는 보완할 점이 있었지만, 첫 고척돔은 에스파가 대형 공연장에 어울리는 팀이라는 것을 확인시킨 무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