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에서 졸장으로,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의 씁쓸한 퇴장
입력 2026.07.01 21:05
수정 2026.07.01 21:05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서 손꼽힐 영웅이 초라하고 불명예스러운 모습으로 사실상 축구계를 떠나게 됐다.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 든 홍명보 전 국가대표팀 감독의 이야기다.
홍명보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한국 축구의 수비 라인을 든든하게 지탱하며 '영원한 리베로'라 불렸던 선수다.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장으로서, 스페인전 승부차기 마지막 키커로 나서 골망을 흔든 뒤 환한 미소로 두 팔을 벌리던 그 장면은 애국가의 주요 장면이자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스포츠 사상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그러나 2026년 그에게 남은 건 팬들의 거센 야유와 욕설, '역대 최악의 졸장'이라는 낙인뿐이다. 아시아 최초로 FIFA 월드컵 브론즈볼을 수상하며 세계적 반열에 올랐던 그가, 감독으로서 왜 이토록 처참한 파국을 맞게 됐을까.
2002 한일월드컵 4강 진출을 확정지은 뒤 두 팔 벌려 기쁨을 표현한 홍명보. 당시 그는 대표팀 주장이었다. ⓒ 연합뉴스
천재 수비수의 탄생, 일본을 정복하다
고려대 졸업 후 1992년 포항제철 아톰즈(현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한 홍명보는 신인 시절부터 탈아시아급 수비 리딩과 패싱력을 선보였다. 이후 일본 J리그로 진출, 1999년 가시와 레이솔 이적 후에는 만년 중하위권이던 팀을 단숨에 리그 3위로 끌어올렸다.
2000년, 보수적인 일본 축구 문화에서 가시와 구단은 외국인 선수인 그에게 주장 완장을 맡기는 파격을 택했다. 외국인 선수가 주장직을 수행하는 사례는 그때까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다. 이후 황선홍·유상철까지 영입하며 외국인 보유 한도 3명을 전부 한국 대표팀 주전으로 채운 '코리안 삼총사'가 탄생했다. 당시 그가 보여준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품격은 지금도 일본 올드팬들이 그에게 깊은 존경을 보내는 이유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포항으로 복귀한 그는 대회 후 미국 MLS LA 갤럭시로 이적, 2003시즌 30경기 중 25경기에 출전하며 'MLS 외국인 베스트 11'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구단과 현지 팬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그는 이듬해 불의의 부상을 당하기 전까지, 한국·일본·미국을 막론하고 늘 리더이자 주전이었다. 무대가 바뀔 때마다 곧바로 핵심으로 자리 잡는 적응력은 단순한 실력을 넘어선 그만의 클래스를 증명하는 대목이었다.
첫 번째 국가대표 감독이 되고난 후 정몽규 회장과 봉사활동에 나선 홍명보. ⓒ 뉴시스
1994년 만회골부터 2002년 4강 신화까지
국가대표 홍명보의 진가는 더 빛났다. 1990년 노르웨이전으로 데뷔한 그는 같은 해 이탈리아 월드컵에 주전 수비수로 나섰고,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스페인전 만회 프리킥골에 이어 서정원의 극적인 동점골을 도우며 2-2 무승부의 기적을 일궈냈다. 이어진 독일전에서는 0-3 열세 속 상대 진영 한가운데서 대포알 같은 오른발 중거리슛을 꽂아 넣었다. 이 골은 그해 대회 최장거리 득점으로 공식 기록됐다. 패색이 짙던 두 경기에서 연달아 한국 축구의 자존심을 지켜낸 셈이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예선 '도쿄 대첩'의 주역으로 활약한 뒤 대표팀 주장 완장을 이어받은 그는,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커리어의 정점을 찍는다. 소집 초반 거스 히딩크 감독과 팽팽한 기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주장 완장은 그의 몫이었다. 최진철-홍명보-김태영으로 이어진 3백 라인은 포르투갈·이탈리아·스페인·독일을 상대로 단 2실점만 내주는 '통곡의 벽'이었다.
스페인과의 8강 승부차기, 마지막 다섯 번째 키커로 나선 그가 골망을 흔들며 4강 신화를 확정 짓는 장면은 대한민국 축구 황금기의 상징이 됐다. 대회 후 아시아 최초로 브론즈볼을 수상한 그는 그해 11월 황선홍과 함께 기립박수 속에 명예롭게 대표팀을 은퇴했다.
2014년 월드컵 실패 후 자진 사퇴한 홍명보 전 감독. 당시에는 이번과 달리 미소를 띄웠다. ⓒ 뉴시스
지도자의 천당과 지옥, 런던의 영광과 브라질의 잔혹사
은퇴 후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 그는 2006년 아드보카트 감독을 보좌하는 코치를 시작으로 2009년 U-20 대표팀 감독에 임명되며 본격적인 사령탑 커리어를 쌓았다.
첫 번째 전성기는 2012년 런던 올림픽이었다. 기성용·구자철·김영권 등 이른바 '홍명보 아이들'이라 불리는 황금 세대를 이끌고 한국 올림픽 축구 사상 최초의 동메달을 따낸 것.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를 발판 삼아 지휘봉을 잡은 2014 브라질 월드컵은 첫 번째 흑역사였다. '의리의 엔트리'라는 비판 속 편향된 선수 기용, 짧은 준비 기간, 현대 축구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는 전술 부재가 겹치며 대표팀은 1무 2패로 조별리그 탈락했다. 분노한 팬들은 귀국하는 대표팀을 향해 엿을 던졌고, 그는 씁쓸하게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이후 중국 항저우 뤼청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두 번째 시즌 부진으로 자진사퇴했다.
울산HD 시절은 그의 축구 인생 마지막 환희였다. ⓒ 뉴시스
울산에서의 부활, 그리고 '비극의 시작'이 된 선택
추락하던 그를 구원한 건 K리그의 울산 HD였다. 2021년 부임 후 특유의 선 굵은 카리스마로 빠르게 팀을 정비한 그는, 2년 차이던 2022시즌 울산 구단과 팬들이 무려 17년 동안 염원하던 K리그1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반짝 우승이 아니었다. 이듬해에도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하며 조기 2연패를 이루며, 그는 명실상부 K리그 최고의 명장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2024시즌 도중, 불과 며칠 전까지 "대표팀행은 없다"고 호언장담했던 그는 돌연 국가대표 감독직을 수락했다. 이 갑작스러운 입장 선회는 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고, 비극의 시작점이 됐다.
2기 홍명보호는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선임 과정을 둘러싼 논란 속에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한 채 시작됐고, 월드컵 예선과 평가전 단계에서부터 단조로운 롱볼 위주 전술 구사, 상대 맞춤형 전략의 실종, 플랜B의 부재가 그대로 노출됐다. 팬들은 경기장을 찾을 때마다 야유를 퍼부었다. 그럼에도 그는 2014년의 굴욕을 만회하겠다며 버텼지만, '원팀'만 강조하는 구시대적 정신력 축구와 내부 결속만 내세우는 리더십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결국 2026 북중미 월드컵에서 졸전 끝에 다시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결과를 받아들었다.
울산 팬들은 국가대표 감독직을 수락한 홍명보에게 거센 항의를 퍼부었다. ⓒ 뉴시스
오만과 독선이 남긴 쓸쓸한 퇴장
참혹한 결과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설명해야 했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불통과 오만으로 일관했다. 귀국장에서 팬들이 "연봉 반납하고 나가라"며 고성을 질렀지만, 그는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고개를 뻣뻣이 든 채 정면만 응시하며 걸어 나갔다.
앞서 열린 사퇴 기자회견에서 "책임을 지기 위해 물러난다"고 말했지만, 정작 리더의 가장 기본적 의무인 '실패에 대한 설명'은 끝내 피했다. 마치 사퇴라는 행위만으로 모든 청산이 끝났으니 더 이상의 질문도 비판도 받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1992년 프로 데뷔 이후 34년간 홍명보라는 이름은 한국 축구의 가장 높은 성벽이자 자부심이었다. 선수 시절의 화려한 커리어와 울산에서의 리그 2연패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업적이다. 그러나 두 번의 월드컵에서 그가 보여준 건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전술적 무능과 소통을 거부한 독선뿐이었다. '영원한 리베로'의 전설은 결국 북중미 참사와 함께 비극적 결말로 막을 내렸다.
이번 북중미월드컵 참사로 현장 복귀는 쉽지 않게 됐다. ⓒ 데일리안 홍금표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