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는 모두의 것 – 정여립의 난 [정명섭의 실록 읽기㊴]
입력 2026.06.30 14:13
수정 2026.06.30 14:13
서기 1589년 10월, 조선은 느닷없이 발칵 뒤집혔다. 전라도 진안에서 활동하던 정여립이 역모를 꾸몄다는 고변이 조정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고변을 올린 사람은 황해도 관찰사 한준과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이었다. 선조는 즉시 의금부 도사를 파견했고, 관군이 들이닥친다는 소식을 들은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서 아들 옥남과 함께 도망쳤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증거를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진 그의 죽음은 이후 3년에 걸친 피바람의 시작점이 되었다. 기축옥사라 불리는 이 사건으로 최소 천여 명이 목숨을 잃거나 유배를 갔다. 조선의 수많은 사화와 옥사들을 통틀어서 손꼽히는 규모였다.
정여립의 난을 배경으로 한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포스터ⓒ
정여립은 원래 율곡 이이가 인재라며 선조에게 직접 천거할 만큼 촉망받던 사람이었다. 서기 1546년 전주에서 태어난 그는 과거에 급제한 뒤 홍문관 수찬 등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이이, 성혼과 같은 서인의 거물들과도 교류가 깊었다. 하지만 이이가 세상을 떠난 뒤, 그는 스승 이이가 속한 서인에서 동인으로 당적을 바꿨다. 스승을 배신했다는 거센 비난이 쏟아졌고, 선조 역시 그를 곱지 않은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주변의 비난과 임금의 외면에 정여립은 스스로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하지만 그가 낙향 이후 보여준 행보는 단순히 실의에 빠진 선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전라도 진안의 죽도에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했다. 양반에서 천민까지, 심지어 승려까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인 이 조직은 매달 정기적으로 모여 활쏘기를 연습했다. 명목은 왜구 방비였다. 실제로 대동계는 서기 1587년 전라도에 왜구가 침입했을 때 관군을 도와 싸우기도 했다. 그 공으로 정여립의 명성은 전라도 일대에서 상당히 높아졌다. 하지만 무장 조직이 신분의 벽을 허물며 몸집을 키워가는 모습은 조정의 눈에 불온하게 비칠 수밖에 없었다. 정여립은 거침없는 언행으로도 유명했다.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겠느냐는 말을 스스럼없이 입에 올렸다. 임금은 하늘이 내린 절대적 존재라는 조선의 통치 이념에 정면으로 맞서는 발언이었다. 왕위가 천명에 의해 특정 가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공공의 것이라는 이 사상은, 당시 기준으로는 반역에 가까웠다. 이 말 한마디만으로도 그는 이미 위험인물이었다. 선조가 그를 특히 경계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많다. 그리고 1589년, 고변이 터졌다. 박충간 등이 올린 고변의 내용은 정여립이 한강이 얼면 거사를 일으키려 했다는 것이었다. 조정의 실권을 쥔 서인 정철이 위관, 즉 수사 책임자로 임명되어 사건을 진두지휘했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였다.
주모자로 지목된 정여립 본인은 이미 죽고 없었다. 남은 사람들의 진술은 혹독한 고문을 통해 받아낸 것들이었고, 그 자백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동인 전체로 수사망을 확대해 나갔다. 이발, 이길 형제가 처형되었고, 정개청, 최영경 등 당대의 이름 높은 동인 인사들이 줄줄이 죽음을 맞았다. 최영경의 경우 역모와의 연관성이 지극히 희박했음에도 옥중에서 사망했다. 정철이 정적인 동인을 제거하기 위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정황은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역모의 실체는 지금도 논쟁 중이다. 정여립이 실제로 거사를 준비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대동계라는 무장 조직의 존재, 그리고 그가 평소 가진 급진적 사상은 역모의 개연성을 뒷받침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반면 고변의 신빙성과 수사 과정의 공정성을 의심하는 시각도 있다. 진술 대부분이 고문에 의해 얻어졌고, 서인이 정치적 목적으로 사건을 부풀렸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정여립은 자신을 변호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스스로 죽었다. 그가 진짜 반역을 꿈꾼 혁명가였는지, 아니면 정치 공작에 희생된 이단아였는지, 400년이 지난 지금도 결론은 나지 않았다.
기축옥사가 현대의 우리에게 남기는 교훈은 단순히 반역과 충절의 문제가 아니다. 3년에 걸쳐 수많은 사람이 처형되고 유배된 방식이다. 고변 하나로 시작된 광풍이 정치적 의도와 결합하면서 무고한 사람들까지 삼켜버렸다. 불확실한 증거와 고문으로 얻어낸 자백 위에 세워진 단죄는 결국 정의가 아니라 권력의 도구였다. 진실을 밝히는 절차를 생략한 채 처벌이 먼저 앞서가는 사회는 언제든 같은 비극을 반복한다는 것, 사건의 실체보다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기축옥사는 피로 써 내려간 역사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정여립이 내뱉은 "천하는 공물"이라는 말은 당시에는 불온한 위험 사상이었다. 하지만 수백 년이 흐른 지금, 그 말의 핵심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시대를 너무 앞서간 사상은 그 시대에 용납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틀린 생각이라는 뜻은 아니다. 정여립의 삶은 한 사회가 낯선 생각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그 사회의 수준을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교훈은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마지막으로 이 가혹한 숙청은 몇 년 후 벌어진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원인이 되었다. 살아있었다면 임진왜란 때 맹활약했을 인재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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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섭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