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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의 탄생 – 민간 조보 [정명섭의 실록 읽기㊲]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6.06.02 14:01
수정 2026.06.02 14:01

조선왕조실록을 읽다 보면 임금이나 신하가 아닌 그 시대를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흔적이 간간이 눈에 띈다. 서기 1577년, 선조 10년에 벌어진 일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 조선시대에는 조보(朝報)라는 것이 있었다. 기별, 혹은 기별지라고도 불렸는데 오늘날로 치면 관보에 해당하는 것으로, 매일 아침 승정원에서 만들어 배포했다. 임금이 내린 어명이나 조정의 인사이동, 과거 시험 날짜 등, 조정에서 처리한 사항들을 한 장의 종이에 흘려 쓰는 서체인 초서체로 받아 적은 것이었다. 관보였기 때문에 이것이 아무나 볼 수 없었고, 원칙적으로 정승과 판서, 한성부윤 같은 고위직 현직 관리들, 그리고 지방 수령 정도에게 만 배포되었다. 일반 백성이 조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공식적으로는 없었다.


조보를 발행하던 승정원의 기별청 ⓒ직접 촬영

그러던 중, 의정부와 사헌부의 허가를 받은 사람들 몇 명이 조보를 활자로 인쇄해서 팔기 시작했다. 손으로 베껴 쓴 것이 아니라 나무로 만든 활자로 찍어냈기 때문에 대량으로 배포할 수 있었다. 면포와 곡물을 내면 누구든 받아볼 수 있었다고 하니, 오늘날로 말하자면 구독료를 받는 상업 신문과 다를 바가 없었다. 2017년에 실물이 처음 발견되었는데, 현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이 유물은 1577년 음력 11월 6일, 15일, 19일, 23일, 24일의 기록을 담고 있다. 혜성 관측 기록, 소에 역병이 돈다는 내용, 인성왕후의 건강 악화 소식 같은 다양한 기사들이 실려 있다. 날짜 간격을 보면 거의 매일 발행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기존에 손으로 베껴 쓴 조보는 초서체로 썼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으면 읽기가 몹시 불편했다. 그런데 활자로 또렷하게 인쇄된 이 민간 조보는 글을 아는 사대부들 사이에서 가독성이 좋다는 이유로 큰 인기를 끌었다. 남겨진 기록을 보면, 방에서 편안하게 받아보았다고 하니, 배달까지 해준 모양이었다.


그런데 1577년 음력 11월 28일, 선조가 이 인쇄된 조보를 우연히 손에 넣게 된다. 대신들 앞에서 선조가 크게 분노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다. 선조가 내세운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국(史局), 즉 역사를 기록하는 기관의 권한을 사사로운 민간에서 침범했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국가기밀이 민간에 줄줄이 새 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보에는 조정의 인사 정보뿐 아니라 외교 현안이나 군사 관련 소식도 담겼으니, 그것이 인쇄되어 불특정 다수에게 팔렸으니 선조 입장에서는 크게 화를 낼 법한 일이었다. 선조의 분노가 커지자 처벌이 뒤따랐다. 민간 조보를 인쇄해서 판매하던 업자들 서른 명 남짓이 가혹한 형벌을 받은 뒤 유배형에 처해졌다. 조선 시대의 유배는 기간이 정해지지 않아 왕의 명령이 없는 한 사실상 영구적인 격리였으니, 이 업자들에게는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는 일이었다. 그런데 처벌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허가를 내준 쪽, 즉 의정부와 사헌부의 관료들도 책임을 면하지 못했다. 이들도 좌천되어 한직으로 밀려났다. 그렇게 석 달 만에 조선의 민간 신문은 막을 내렸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율곡 이이가 이 일을 두고 한마디 했다는 것이다. 이이는 마침 황해도 해주로 낙향해 있던 시기였다. 그는 윗사람들은 저마다 책임을 피하려고 급급한데 정작 아랫사람들만 가혹한 처벌을 받고 있다고 비판했다. 허가를 내준 것은 의정부와 사헌부의 관료들이었고, 인쇄를 한 것은 그 허가를 믿고 사업을 벌인 민간 업자들이었다. 관료들은 좌천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처분에 그쳤다. 하지만 정작 허가를 믿고 따랐던 업자들은 유배라는 중형을 받았으니 이이의 비판은 당연한 것이었다. 조선 시대에도 윗사람들의 책임 회피는 지금과 똑같다는 사실은 인간의 본성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 사건 이후로 1883년에 한성순보가 발행될 때까지 민간에서 신문을 발행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선조의 분노로 인해 300년 뒤로 돌려놓은 셈이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은 없지만, 만약 민간에서 조보가 계속 발행되었다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해보곤 한다. 독일의 라이프치거 짜이퉁이 세계 최초의 일간 신문으로 인정받은 것이 1660년이니, 1577년의 민간 조보는 그보다 80여 년이나 앞선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조선의 민간 조보가 세계 최초의 상업 일간지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타이틀이야 상징적인 문제라고 치더라도, 지속적인 민간 신문의 존재가 조선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는 조금 더 생각해볼만 한 문제다. 당장 불과 15년 뒤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터진다.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는 상황에서 백성들은 조정의 사정을 알 길이 없었다.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피란길에 오른다는 소식이 퍼지자 분노한 백성들이 경복궁에 불을 질렀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다. 정보가 막혀 있는 상황에서는 소문이 사실보다 빠르게 퍼지고, 사실보다 훨씬 더 사람들을 극단으로 몰아가기 마련이다. 민간 조보가 전란의 상황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면, 혼란을 잠재울 수 있었을 것이다. 아울러, 선조의 사망 이후 실록을 편찬해야 했는데 관련 기록들이 모두 사라져서 사대부 집에 보관된 개인 일기와 지방에 남아 있던 조보들을 악착같이 긁어모아야 했다. 만약 민간에서 조보를 계속 발행하고 있었다면 관련 기록들을 좀 더 쉽게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정명섭 작가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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