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카카오톡
블로그
페이스북
X
주소복사

당쟁의 시작 - 동인과 서인의 탄생 [정명섭의 실록 읽기㊳]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6.06.16 14:01
수정 2026.06.16 14:01

서기 1572년 선조 5년 7월 7일, 74세의 영의정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이름은 이준경으로 어릴 적에 갑자사화에 연좌되어 여섯 살에 귀양을 갔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난 이후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모두 겪은 인물이었다. 그가 임종하면서 선조에게 올린 마지막 상소인 유차(遺箚)에는 네 가지 당부가 담겨 있었다. 그중 마지막 항목이 눈길을 끈다.


이조가 있던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 바라본 광화문과 경복궁의 모습 ⓒ직접촬영

붕당(朋黨)의 사론(私論)을 없애야 합니다. 지금의 사람들은 잘못한 과실이 없고 또 법에 어긋난 일이 없더라도 자기와 한마디만 서로 맞지 않으면 배척하여 용납하지 않습니다.

죽어가는 노신의 이 경고에 조정은 반발했다. 이이와 유성룡을 비롯한 신진 사류들은 이준경이 사림에게 화를 끼치려고 없는 말을 지어냈다며 거칠게 반박했다. 사화때 죽어간 선배들의 원통함을 기억하는 사림에게 붕당의 혐의를 씌운다는 것은 극히 모욕적인 일이었다. 선조도 처음에는 이준경의 유차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듯했으나, 조정 신하들의 거센 반발에 결국 이준경의 관작을 삭탈해 버린다. 그로부터 불과 3년 뒤, 이준경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조선의 관직 중에 이조전랑(吏曹銓郎)이라는 자리가 있었다. 정5품 정랑과 정6품 좌랑을 합쳐 부르는 말인데, 품계로만 보면 결코 높은 자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자리가 가진 권한은 품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막강한 것이었다.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이른바 삼사(三司)의 관원들에 대한 인사권을 쥐고 있었고, 판서나 참판 같은 상관들도 이 인사에는 함부로 관여할 수 없었다. 거기에다 후임자를 스스로 추천하는 천대법까지 있었다. 이조전랑 자리를 차지하는 쪽이 조정의 여론을 좌우하는 삼사의 인사를 틀어쥘 수 있었던 것이다.


서기 1574년, 이조전랑 오건이 자리를 옮기면서 후임으로 김효원을 천거했다. 장원급제로 이름이 떨쳤고,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한 촉망받는 신진 사대부였다. 그런데 당시 이조참의였던 심의겸이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김효원이 젊었을 때 권신 윤원형의 집을 드나들던 식객이었다는 이유였다. 윤원형은 을사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사림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었으니, 그의 집에 드나들었다는 것은 선비에게는 치명적인 흠집이었다. 하지만 실상을 따져보면 이야기가 달랐다. 김효원에게는 윤원형의 사위와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처가 살이를 해서 윤원형의 집을 왕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주치게 된 것이었다. 식객이라기보다는 친구 따라간 자리에서 우연히 보게 된 것에 가까웠다. 결국 이 사실이 밝혀지면서 심의겸의 반대는 무산되고 김효원이 이조전랑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앙금이 남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1575년, 불씨가 다시 타올랐다. 김효원이 이조전랑 자리를 떠나게 되자 후임으로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유력한 후보로 물망에 올랐다. 그러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조전랑은 외척이 맡을 자리가 아니라는 명분이었다. 심충겸은 명종의 왕비였던 인순왕후의 남동생이었다. 선조는 명종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했으니 심충겸은 선조에게도 외삼촌뻘이 되는 셈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인순왕후는 이미 섭정에서 물러난 뒤였고 1575년 당시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거기다 심충겸도 과거를 통해 정정당당히 등용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김효원의 반격은 성공했다. 심충겸 대신 이발이 이조전랑에 임명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정은 둘로 갈라졌다. 젊은 신진 사대부들은 김효원 편이었고, 명종 시절부터 조정에 발을 걸쳐온 중진 사대부들은 심의겸 편을 들었다. 이들에게 각각 동인과 서인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두 사람의 집 위치 때문이었다. 김효원의 집이 도성 동쪽 낙산 아래 건천동에 있었고, 심의겸의 집이 도성 서쪽 정동에 있었다. 그래서 김효원을 지지하는 무리는 동인, 심의겸을 옳다고 믿은 무리는 서인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름의 유래가 단순하기 그지없었지만 이후 조선의 정치를 수백 년 동안 규정하는 거대한 틀이 되었다.


이 분란을 막으려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대사헌이었던 율곡 이이는 우의정 노수신과 함께 두 사람을 모두 한양에서 내보내는 방책을 선조에게 건의했다. 심의겸은 개성부유수로, 김효원은 함경도 경흥부사로 내려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조치가 오히려 불을 더 키우고 말았다.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성과는 달리 경흥은 두만강 하구 근처 변방이었기 때문이다. 동인들은 이이가 겉으로는 중립인 척하면서 실제로는 서인 편을 든 것이라고 항의했다. 상소가 빗발쳤고, 삼사에서도 이이를 비판했다. 결국, 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선조실록의 사관은 훗날 선조 32년 6월 기사에서 이 당쟁을 돌아보며 울분에 찬 기록을 남겼다. 동서로 나뉜 것도 부끄러운데, 그 후로는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져 추악한 말로 서로 무함하기를 마치 장사치나 여자들이 언쟁하듯 한다는 것이었다. 공도를 무너뜨리고 임금을 잊고 국사를 그르쳤으니 통분함을 금할 수 없다는 탄식이었다.



정명섭 작가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댓글 0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