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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싸고 뻔한’ 할리우드 전성기 끝?…로컬 콘텐츠로 눈 돌린 글로벌 플랫폼 [주류가 된 비영어권①]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6.06.26 17:53
수정 2026.06.26 17:53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이 연 비영어권 시대

제작비는 낮고 흥행은 글로벌…넷플릭스가 로컬 콘텐츠에 베팅한 이유

‘공개 28일 만에 1억 1100만 가구 시청’ ‘넷플릭스 역사상 가장 빠른 흥행 기록’ ‘황동혁 감독, 아시아인 최초 에미상 드라마 시리즈 감독상 수상’ ‘이정제, 에미상 아시아인 최초로 남우주연상 수상’.

'오징어게임' 스틸컷 ⓒ넷플릭스


2021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글로벌 흥행은 비영어권 콘텐츠 시대의 개막을 알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비영어권 콘텐츠가 더 이상 주변부가 아니라 글로벌 콘텐츠 시장의 중심으로 진입했음을 장면을 여럿 만들어냈다.


한국 콘텐츠 위상 변화는 갑작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출발점은 2020년이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비영어권 영화 최초로 작품상을 수상하며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새로 썼다. 당시 봉 감독이 남긴 "자막이라는 1인치 장벽을 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은 향후 콘텐츠 산업 방향을 압축적으로 드러냈다. 자막에 거부감이 없는 스트리밍 세대가 콘텐츠 소비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었고, 글로벌 플랫폼들은 이를 누구보다 빠르게 데이터로 확인하고 있었다.


비영어권 콘텐츠의 부상은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글로벌 시청자들의 관심보다는 ‘자본과 수익성’이라는 현실적인 비즈니스 논리에서 출발했다.


글로벌 OTT 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들고 전 세계 가입자 성장이 둔화하면서, 플랫폼 기업들은 신규 구독자 확보와 천정부지로 치솟는 제작비 효율화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발견한 대안이 할리우드를 벗어난 ‘로컬 콘텐츠’였다.


영국의 미디어 리서치 기관 앰피어 애널리시스(Ampere Analysis)는 국제 콘텐츠 프로그래밍 전략에 대해 "미국 대작에 비해 제작비 부담은 낮으면서도, 현지 및 글로벌 신규 가입자를 유입시키고 해외 시장을 확장하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분석했다.


'기묘한 이야기4' 스틸컷ⓒ넷플릭스

플랫폼이 움직인 근거는 직관적인 숫자에 있다.


넷플릭스의 대표적인 영어권 히트작인 '기묘한 이야기' 시즌4의 경우, 회당 제작비가 약 3000만 달러에 달했다. 총 9부작으로 구성된 이 시리즈의 전체 예산은 2억 7000만 달러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한 편을 제작하는 비용과 비슷하다. 반면 한국의 '오징어 게임' 시즌1의 총 제작비는 약 2140만 달러였다. 이를 회당 비용으로 환산하면 약 240만 달러로, '기묘한 이야기'의 12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이처럼 적은 자본을 투입하고도 동등하거나, 이를 능가하는 파급력을 낳는 효율성에 플랫폼들이 투자 방향을 바꾸는 것은 당연한 순리였다.


투자 구조의 변화도 빠르게 일어났다. 앰피어 애널리시스에 따르면 2024년 넷플릭스의 전체 콘텐츠 예산 가운데 북미 외 지역의 투자 비중이 처음으로 51%를 돌파했다. 로컬 콘텐츠가 단순한 구색 맞추기용 부가 상품이 아니라, 플랫폼의 성장을 책임지는 핵심 전략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배우이자 SAG-AFTRA 조합원인 제프리 리브스가 2023년 5월 8일 월요일 로스앤젤레스 파라마운트 픽처스 스튜디오 앞에서 열린 미국 작가 조합(WGA) 집회에 참가하고 있다ⓒ뉴시스/AP


여기에 2023년 발생한 할리우드 대파업은 이러한 공급망 전환 흐름을 더욱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작가조합(WGA)과 미국배우·방송인노동조합(SAG-AFTRA)의 동시 장기 파업으로 할리우드의 주류 제작 시스템이 수개월간 멈춰 서면서 미국산 신작 콘텐츠 공급에 차질이 빚어졌다. 그러나 미국의 파업과 무관한 한국, 스페인, 일본 등 비영어권 국가의 신작들이 공급됐다. 글로벌 플랫폼들은 특정 국가나 언어권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구조가 지닌 리스크를 체감했고, 콘텐츠 파이프라인 다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비영어권 콘텐츠는 미국산의 대체재가 아니라, 플랫폼의 안정적 운영을 위한 필수 자산으로 자리 잡았다.


공급의 축이 이동하는 동안 시청자들의 수요 구조 역시 바뀌었다.


어린 시절부터 유튜브, 틱톡 등 숏폼 플랫폼과 국경 없는 스트리밍 환경 속에서 성장한 세대에게 자막은 콘텐츠 선택의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이들은 언어와 국가보다 서사 자체의 재미와 글로벌 화제성을 우선시한다. 통계적 수치도 이를 증명한다.


조사에 따르면 전통적인 영어권 국가인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에서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를 정기적으로 시청한다고 답한 응답자의 비율은 2020년 22%에서 2025년 35%로 13%포인트 올랐다. 특히 18~34세 연령층은 45세 이상의 연령층에 비해 비영어권 콘텐츠를 소비하는 비중이 뚜렷하게 높게 나타났다. 몇 년 만에 대중문화를 소비하고 평가하는 글로벌 기준 자체가 바뀐 셈이다.


이러한 플랫폼의 투자 전략과 시청자들의 소비 습관이 맞물려 미디어 산업에는 새로운 흥행 공식이 자리를 잡았다. 과거에는 각국 작품들이 해외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미국식 정서와 할리우드식 문법에 맞추는 현지화가 필수 조건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한국의 '오징어 게임', 스페인의 '종이의 집', 인도의 '세이크리드 게임즈'는 정반대의 결과를 보여줬다. 한국 사회의 경쟁 구조와 계급 갈등, 스페인 경제 위기 이후 청년 세대가 품게 된 사회를 향한 불만, 인도 사회의 종교 분쟁과 정치적 부패 등 자국의 특수한 정서와 사회적 맥락을 과감하게 전면에 내세운 서사들이 오히려 전 세계 관객들의 공감을 자극했다. 가장 지역적이고 특수한 이야기가 국경을 초월해 가장 보편적이고 강력한 글로벌 경쟁력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국제 시상식 풍경도 달라졌다. 과거 비영어권 콘텐츠는 칸, 베를린, 베니스 등 유럽의 예술영화제라는 제한된 무대에서 주목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아카데미, 에미상, 골든글로브 등 상업성과 대중성을 상징하는 주류 시상식의 중심부로 이동하고 있다. 특히 미국 스튜디오인 FX와 디즈니가 자본과 기획을 주도하고 일본어 대사와 배경으로 제작된 드라마 '쇼군'이 에미상에서 18관왕을 차지한 것은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이는 할리우드 자본이 비영어권 로컬 문화가 가진 강력한 상품성과 비즈니스 가치를 확실히 인지하고, 그것이 돈이 되는 시장이라는 계산 하에 직접 대규모 투자를 감행해 생산에 뛰어들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한때 예외적인 사건으로 여겨졌던 비영어권 콘텐츠의 수상이 이제는 철저한 자본의 주도 하에 반복되는 흐름으로 안착했음을 증명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글로벌 스트리밍 플랫폼들이 로컬 콘텐츠에 투자를 감행하는 것은 문화적 배려나 시혜가 아니라, 급변하는 미디어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현실적인 생존 전략인 셈이다. 오늘날에는 스트리밍 플랫폼의 정교한 개인화 알고리즘과 글로벌 자본의 유입을 통해, 자국의 고유한 문화적 자산이 곧바로 세계적인 상품이 되는 선순환 산업 구조가 완벽하게 정착했다. 로컬 콘텐츠가 세계 시장에서 독보적인 차별성을 획득하고, 이 흥행이 다시 글로벌 자본의 현지 투자 확대로 이어지는 생태계가 마련된 것이다.


이처럼 글로벌 플랫폼들이 로컬 콘텐츠에 주목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적은 비용으로도 글로벌 흥행을 만들어낼 수 있는 효율성과, 특정 국가에 의존하지 않는 안정적인 콘텐츠 공급망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영어권 콘텐츠는 더 이상 할리우드 콘텐츠의 대체재가 아니다. 이제는 글로벌 스트리밍 산업의 성장을 이끄는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았다.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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