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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성의 가장 낯선 얼굴 ‘호프’ [칸 리포트]

데일리안(프랑스, 칸) =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6.05.19 09:23
수정 2026.05.19 09:50

배우 조인성이 또 한 번 자신을 깨고 나왔다. 나홍진 감독의 신작 영화 ‘호프’에서 시골 공동체의 중심이자 미지의 재난에 맞서는 인물 성기를 맡아 외형적 강박까지 내려놓은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선보인 것. 그 치열했던 고민의 대가는 생애 첫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이라는 영광으로 돌아왔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화려한 성과 앞에서도 들뜨기보다 스크린 위로 또 다른 탈을 쓰고 기꺼이 불편한 과정 속으로 뛰어드는, 프랑스 칸 마제스틱 바리에르 호텔은 18일(현지시간), 여전히 스스로를 '과정 중'이라 말하는 배우 조인성의 진심 어린 목소리로 가득 찼다.


나홍진 감독의 독창적인 세계관 안에서 조인성이 마주한 가장 큰 과제는 ‘보이지 않는 대상’과의 사투였다. 감독은 구체적인 디렉팅 대신 현장의 공기 자체를 지배하는 긴장감을 강조했고, 조인성은 오직 자신의 표현력만으로 보이지 않는 공포를 스크린에 채워 넣어야 했다.


“뚜렷하게 무언가를 주문하셨다기보다는 현장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긴장감과 무드에 대해 굉장히 많이 이야기하셨어요. 크리처물이다 보니 정확한 사물 없이 연기해야 하는 장면들이 많았죠. 결국 배우들의 호흡과 분위기만으로 공포를 전달해야 했고, 얼굴만으로도 긴장감을 느끼게 만드는 작업을 많이 했어요.”


집요하기로 정평이 난 나홍진 감독의 완벽주의는 촬영이 모두 끝난 후반 작업 단계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영화의 완성도를 위해서라면 단 한 줄의 숨소리조차 타협하지 않는 감독의 집념은 조인성에게도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나홍진 감독님의 가장 큰 강점은 집요함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미 후반 작업이 거의 끝난 시점인데도 다시 배우를 불러 추가 작업을 진행하시더라고요. 데뷔 28년 만에 처음 겪는 일이었어요. 좋다 나쁘다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원하는 빛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구름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분이란 거죠. 칸에 오기 한 달 전에도 다시 호흡 녹음을 했어요. 감독님은 끝까지 작업을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세요. CG 작업과 편집이 계속 바뀌다 보면 빈 공간이 생기는데, 기존 소스를 쓰기보다 직접 와서 다시 호흡해주길 원하셨죠. 그런 철저함과 완벽주의가 감독님의 스타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뤼미에르 대극장을 가득 채운 기립박수와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조인성은 담담함과 여유를 잃지 않으려 했다.


“뤼미에르 극장의 기립박수는 우리 영화만의 특별한 일이 아니라 칸이 영화를 존중하는 방식이라고 느꼈어요. 그래서 어제는 오히려 이 문화를 제대로 느껴보려고 했죠. 너무 제 감정에만 빠져 있으면 전체를 못 볼 것 같아서 가능한 한 ‘옆집 구경하듯’ 바라보려고 했어요. 또 유럽 관객들이 상영 중 환호하고 박수치는 문화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걸 실제로 경험해보니 또 다르더라고요.”


관객들에게 각인된 기존의 댄디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완전히 지워내고, 미지의 재난 앞에 처절하게 부딪히는 낯선 얼굴을 꺼내 보인 도전이었다. 대중에게 익숙한 스타성을 내려놓고 전혀 다른 결의 인물로 분했기에, 극장을 나선 이들의 호평이 힘이 됐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조인성의 모습’이라고 말씀해주신 게 감사했어요. 배우 입장에서는 또 다른 탈을 쓰고 연기한 건데, 그 모습이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여졌으면 하는 희망이 있었죠. 영화 제목처럼 결국 ‘호프’인 셈이에요.”


위험천만한 순간에는 안전을 위해 대역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중심이 되는 대부분의 액션은 직접 몸을 던져 소화했다. 특히 모형 말이 아닌 진짜 말 위에서 펼쳐지는 승마 장면까지 직접 이끌며 현장의 압도적인 생동감을 필름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관객의 눈에는 스쳐 지나갈 작은 디테일일지라도, 화면을 뚫고 나오는 진짜 생동감의 차이를 만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도전이었다.


“이번 작품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끝까지 밀어붙였던 현장이었어요. 말 타는 장면도 더미 없이 직접 촬영했죠. 관객분들이 그 차이를 정확히 구분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생동감에서는 분명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위험한 장면들은 당연히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제가 시작해야 장면이 완성되는 거였어요. 감독님도 배우 부상을 굉장히 우려하셔서 특수 장비를 따로 제작하고 무술감독팀까지 붙여 최대한 안전하게 준비하셨어요.”


세련된 이미지를 잠시 내려놓고 시골 마을 호포항의 주민으로 녹아들기 위해, 조인성은 화려하게 정돈된 비주얼 대신 투박하고 자연스러운 생활감을 입히는 데 집중했다.


“일부러 몇 kg를 증량한 건 아니었어요. 이번 작품에서는 외형 관리에 대한 강박을 조금 내려놨죠. 수염도 기르고 몸도 자연스럽게 두면서 성기라는 인물의 생활감을 만들고 싶었어요.”


조인성은 압도적인 존재 마주한 무기력한 인간이 아닌, 끝까지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려는 의지를 캐릭터의 중심축으로 삼았다.


“인간이 절대 이길 수 없는 존재를 만났을 때는 결국 두 가지라고 생각했어요. 돌아서 도망가거나, 인간의 존엄성을 보여주거나요. 성기는 후자를 선택하는 인물이라고 봤죠. 어차피 넘어설 수 없는 상대라면 끝까지 맞서보겠다는 에너지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극한의 상황 속에서 터져 나오는 감정의 폭발을 가장 사실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대사 한 마디의 뉘앙스까지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영화 후반부 거칠게 쏟아내는 욕설조차 정제된 대사가 아닌, 벼랑 끝에 몰린 인간이 뱉을 수 있는 가장 가공되지 않은 정서 그 자체였다.


“후반부 욕설 장면도 사실 다른 표현을 많이 고민했어요. 감탄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국어 선생님까지 떠올릴 정도였죠. 그런데 결국 그 상황에서는 그 단어밖에 안 나오더라고요. 욕이긴 하지만 단순한 욕이라기보다는 그 상황의 정서에 가까운 표현이라고 생각했어요.”


조인성은 류승완, 이창동, 나홍진 감독 등 자신을 끊임없이 새로운 지점으로 밀어붙인 연출자들과의 작업을 떠올리며, 배우로서 스스로를 확장해가는 과정에 대한 생각도 진솔하게 털어놨다.


“좋은 감독님과 작업한다는 건 결국 배우 안의 새로운 무언가를 끌어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불편하고 고통스럽죠. 하지만 그걸 피하면 배우로서 스스로에게 창피할 것 같았어요. 아직도 좋은 감독님들이 저를 찾아주신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고 축복 같은 일이에요.”


칸 경쟁 부문 입성이라는 화려한 성과 앞에서도 조인성은 들뜬 감정보다는 여전히 과정 안에 있는 배우로서의 태도를 먼저 꺼내 보였다. 세계적인 축제의 한복판에서 그가 남긴 나침반은 결국 스포트라이트가 아닌, 다음 행선지를 향한 묵묵한 발걸음이었다.


“칸 경쟁 부문에 왔다고 해서 그게 곧 저를 증명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영화가 가져가야 할 위치가 있었고, 그 결과 여기까지 오게 된 거라고 생각했죠. 저는 아직도 계속 과정 속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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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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