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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서 마주한 삶의 순환”…나상천 작가가 전하는 800km 치유의 기록 [D:인터뷰]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6.05.14 01:14
수정 2026.05.14 01:14

첫 장편 소설 '어느 멋진 도망' 출간...대극장 뮤지컬 '까미네로' 내년 2월 개막

"절망 끝에서 시작된 여정, 마지막 걸음이 다시 첫 걸음으로"

"딸 위해 시작한 집필 활동...각자의 고민 안은 사람들에게도 힐링 됐으면"

스페인 북서부의 끝을 향해 뻗은 800km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오랜 시간 수많은 이들에게 단순한 여행지 이상의 공간으로 자리해 왔다. 육체적 고행을 통해 일상의 소음을 덜어내고 오로지 걷는 행위 자체에 몰입하게 만드는 이 길은,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떠난 이들에게 자신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내어준다. 나상천 작가 역시 삶의 가장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 위해 이 길을 선택했다.


ⓒ꿈의엔진

수십 년간 걸스데이, 모모랜드 등 케이팝(K-POP) 아티스트를 키워내며 가요계의 화려한 이면을 지켜온 기획자 나상천은 이제 작가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대중 앞에 섰다. 33일간 800km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온몸으로 통과하며 집필한 소설 ‘어느 멋진 도망’은 그의 치열했던 내면의 기록이자, 현재 준비 중인 대형 창작 뮤지컬 ‘까미네로’의 모태가 된 작품이다. 삶의 가장 무거운 순간을 뒤로하고 떠났던 길의 끝에서 그는 단순한 도망이 아닌, 다시 일상으로 기꺼이 복귀할 수 있는 단단한 용기를 발견하며 인생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나 작가가 산티아고 순례길로 향하게 된 것은 스스로의 의지보다는 주변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그는 아내와 어머니를 연이어 떠나보낸 깊은 상실감 속에 있었고, 일상의 작은 자극조차 두려움으로 다가올 정도로 심신이 지쳐 있었다. 무너진 아빠의 모습을 사춘기 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선택한 여정이었지만, 매일 같이 반복되는 육체적 고통은 그를 끊임없이 시험에 들게 했다.


“당시 몸도, 마음도 돌보기 힘든. 그야말로 삶을 모두 놓아버리고 싶은 상태였어요. 그런 모습을 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도망치듯 떠난 거죠. 문제는 공황장애가 너무 심해서 생각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더라고요. 정말 삶의 끝자락에 와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이 여정을 포기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더라고요.”


결국 여정의 중반부에서 한계에 부딪힌 작가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 표를 알아보던 중, 그를 붙잡은 것은 동행하던 선배와 그곳에서 만난 스페인 부부 파코와 제니퍼의 조언이었다.


‘이 길은 너를 위한 길이야. 오로지 너만을 위해 걸어. 힘들면 쉬어가도 돼. 가고 싶지 않으면 멈춰도 돼. 그러다 보면 너를 만나게 될 거야. 널 만나면 그때 비로소 네 옆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 알게 될 거야.’


“그 이야기를 듣고 옆을 보니 저를 여기까지 이끌어준 선배가 비로소 보였어요. 이 선배가 나에게 천사였다는 걸 그제야 깨닫게 된 거죠. 선배 뿐만 아니라, 돌이켜보니 물집이 잡혔을 때 밴드를 주고, 배가 아플 때 약을 건네며 등을 토닥여주던 수많은 천사가 제 곁에 있었더라고요. 고통에 잠식되어 그동안 그들이 보이지 않았던 것 뿐이었죠. 세상은 결코 혼자 사는 게 아니고, 이 고통 역시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다시 걸어볼 용기가 생겼던 것 같아요.”


ⓒ꿈의엔진

창작의 시작은 사춘기 딸을 향한 부성애였다. 상실의 아픔을 겪는 딸에게 삶의 지혜를 전하고 싶었던 그는 딸이 좋아하는 뮤지컬이라는 우회로를 택해 대본을 써 내려갔다. 첫 여정 후 시작된 집필은 70%에서 멈췄으나, 1년 뒤 다시 찾은 순례길에서 ‘연대’의 가치를 배우며 마침내 완성됐다. 이후 공연을 준비하며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극의 정서를 세밀하게 전달하려 쓴 시놉시스와 트리트먼트가 토대가 돼 장편 소설 ‘어느 멋진 도망’이 탄생했다.


“딸에게 인생은 기쁨도 있지만 슬픔도 당연히 있는 것이라는 점을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슬픔은 어색하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아름다운 과정 속에 당연히 존재하는 것임을요. 딸이 아빠의 말을 깊게 듣기 힘들어하는 사춘기였기에, 좋아하는 뮤지컬로 만들면 재밌게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이후 배우들에게 순례길의 느낌을 더 디테일하게 설명하려다 보니 어느새 소설이 되어 있었습니다. 딸이 좋아하는 뮤지컬과 소설을 통해 아빠가 전해주고 싶은 이 정신적 자양분이 자연스럽게 스며들길 바라는 마음으로 펜을 들었습니다.”


에세이가 아닌, ‘소설’이라는 형식을 선택한 이유는 개인의 회고를 넘어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고민을 입체적으로 투영하기 위한 창작적 결단이었다.


“에세이는 제 개인의 이야기로 흐르기 쉽지만, 하나의 극으로 쓰게 되면 읽는 사람도 재미를 느낄 수 있고 다양한 이들의 경험을 한 번에 맛보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소설 속 네 명의 주인공은 제가 실제 길 위에서 만난 인연들에 저의 페르소나를 나누어 담아 만든 캐릭터들입니다. 미슐랭을 찾아다니던 셰프, 조회수에 집착하던 유튜버, 싱어송라이터 등 각자의 고민을 가진 인물들을 통해 독자들이 자신만의 힐링을 얻길 바랐습니다.”


소설이 배우들을 위한 일종의 가이드에서 시작된 만큼, 현재 제작 중인 대형 창작 뮤지컬 ‘까미네로’는 그 어떤 작품보다 탄탄한 서사를 갖추게 됐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이 길 위에서 만난 다양한 인물들의 고민과 연대의 힘을 무대 위에 펼쳐 보일 예정이다. 뮤지컬은 오는 9월까지 캐스팅을 완료하고, 내년 2월 정식 개막을 목표로 하고 있다.


“첫 번째 순례가 나 자신을 만나는 성찰의 시간이었다면, 1년 뒤 떠난 두 번째 순례에서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사람 사이의 ‘연대’였습니다. 그 어울림의 감동을 무대 위에 펼치려 합니다.”


나 작가는 이번 작품을 통해 스스로 ‘인생을 찾아 돌아왔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도전이 미뤄두었던 꿈을 다시 꾸기 시작하는 많은 이들에게 작은 희망의 불씨가 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걷다 보면 배낭의 무게를 줄여야 발걸음이 가벼워지듯, 인생의 무게도 내려놓으면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배웠습니다. 꿈을 미뤄뒀다가 다시 꿈을 꾸는 일에 도전하고 있는 저의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인생은 영원히 행복할 수도, 영원히 불행할 수도 없습니다. 그 흐름을 어떻게 잘 받아들이고 보내느냐가 중요합니다. 인생은 순환입니다. 실패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실패가 다시 시작을 위한 동력이 되죠. 마지막 걸음이 다시 첫 걸음이 될 수 있듯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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