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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그룹 조중훈 창업주 탄생 100주년…‘수송보국’ 경영철학 재조명

이도영 기자 (ldy@dailian.co.kr)
입력 2020.03.11 17:10
수정 2020.03.11 17:12

트럭 한 대서 종합물류기업으로 성장…사회 복지 증진까지

기간산업으로 산업화에 이바지…신용·국익·인재양성 중시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한진그룹

조중훈 창업주 탄생 100주년(5일)을 맞아 그가 일평생을 바친 한진그룹의 ‘수송보국’ 경영철학이 재조명받고 있다.


1945년 11월 1일 인천에 한진상사 창업으로 한진그룹의 태동을 시작한 조 창업주는 수송보국 정신을 바탕으로 한 나라의 동맥인 수송 사업으로 국가 경제를 발전시켰다.


조 창업주가 많은 업종 중에서 수송·물류업을 택한 이유는 국가에 헌신하기 위해서다. 교통과 수송은 인체의 혈관처럼 정치·경제·문화·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기간산업이므로 수송으로 우리나라의 산업화에 이바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 창업주의 수송보국 이념은 당시 부실기업인 대한항공과 한진해운 인수 과정에서 엿볼 수 있다. 조 창업주는 대한항공 인수 당시 “밑지면서도 계속해야 하는 사업이 있다”고 했고 대한항공공사 인수에 대해서는 “국익과 공익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소명”이라고 말했다.


한진해운 인수 때는 “타산적인 차원으로 관계자들의 고뇌와 업계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한민족의 전진’이라는 의미를 담고 한진그룹은 수송사업으로 우리 민족을 잘 살게 하겠다는 그의 신념을 반영하고 있다.


조 창업주의 경영이념은 고(故)조양호 선대회장을 거쳐 지금의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한진그룹의 핵심 DNA다. 한진그룹의 수송보국은 국가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면서 국민의 기업으로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는 참된 기업가 정신을 요구한다.


◆고난 속에서도 견문 넓혀… 한진그룹 태동 밑거름


조 창업주는 1920년 2월 11일(음력) 서울시 서대문구 미근동에서 4남 4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운영하던 직물점이 1930년대 후반 대공황과 화재로 부도를 맞으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가세가 기울자 조 창업주는 휘문고보를 중퇴하고, 국비 교육기관이었던 경상남도 진해의 해원양성소를 선택했다.


원래 기계에 대한 호기심이 유별났던 그는 2년 만에 해원양성소 기관과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일본 고베 조선소의 수습생으로 발탁되며 열일곱 나이에 세계로의 첫발을 내디뎠다.


조 창업주는 낮에는 조선소에서 기술을 익히고, 밤에 하숙방에 돌아와 책을 놓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헌책방에서 고서를 빌려 침을 발라가며 읽다가 폐결핵을 앓기도 했다.


◆트럭 한 대로 시작한 한진상사…고난과 시련 속 ‘신용’ 힘 믿어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대한민국 경제는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 인천항에는 중국 상해에서 건너온 운동화·양복·밀가루 등 생필품들이 밀려들었다.


그해 11월 1일 조 창업주는 그동안 저축해 둔 돈을 모아 트럭 한 대를 장만하고, 인천시 해안동에 한진상사를 설립했다. ‘한진’은 ‘한민족의 전진’이라는 의미를 새긴 것으로 사업을 통해 우리 민족을 잘살게 하겠다는 조 창업주의 신념을 반영했다.


그는 사업 초기부터 ‘신용’을 사업가의 기본 소양으로 여겼다. 한진상사는 이를 바탕으로 사업 시작 5년 만에 종업원 40여명, 트럭 30여대를 보유한 회사로 성장했다.


조 창업주가 서른이 되든 해 발발한 한국전쟁은 한진상사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차량과 장비들은 군수물자로 동원돼 뿔뿔이 흩어졌다. 1953년 봄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그는 인천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한진상사의 시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쑥대밭이 된 땅과 은행 빚만 남아 있었다.


조 창업주는 폐허 위에 가건물을 세우고 피난 때 몰고 갔던 트럭 한 대로 밤낮없이 회사 재건에 몰두했다. 이때 그가 그동안 쌓아온 신용이 빛을 발했다. 투자자들에게 무담보로 대출받고 단골손님들의 도움으로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1969년 3월 김포공항에서 열린 대한항공공사 인수식.ⓒ한진그룹

◆땅에서 하늘로…월남전 美 물자 수송사업으로 회사 성장 견인


조 창업주의 ‘신용’으로 한진상사는 미군 운송권을 독점하다시피 따냈다. 1959년에는 ‘대한민국 경제 1번지’라 불렸던 소공동 반도호텔에 사무실을 열었다. 1960년에는 한해 220만달러의 외화를 벌고, 500대의 보유차량을 거느린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한진그룹은 1960년 하늘로 사업영역을 늘렸다. 그해 8월 15일 조 창업주는 수송보국의 꿈을 하늘에서도 펼쳐 보겠다 마음먹고 4인승 세스나 비행기 1대로 에어택시 사업을 시작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주식회사 한국항공’ 설립 신고도 냈다. 기대 이상의 성과에 힘입어 1961년 2월 40인승 컨베어-240기를 추가로 사들여 서울~부산 노선을 운항했다.


하지만 한국항공은 당시 정부에서 대한국민항공사(KNA)를 전폭 지원함에 따라 경쟁력을 잃었다. 조 창업주는 항공사업의 꿈을 접는 대신 1961년 8월 주한미국 통근버스 20대를 매입해 서울~인천 구간에서 한국 최초의 ‘좌석버스’ 사업을 시작했다. 한진고속의 시초다.


조중훈 창업주는 1965년 12월 베트남의 퀴논항에는 하역 순서를 기다리기 위해 30여척의 화물선을 보고 사업 구상을 했다. 퀴논에 파병 중인 미군들을 끈질기게 설득했고 미군 사령부와 790만달러에 달하는 군수물품 수송계약을 체결했다. 한진상사는 종전인 1971년까지 5년간 총 1억5000만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였다. 당시 대한민국 1인당 국민소득이 125~200달러 안팎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명실상부한 육·해·공 종합수송그룹으로 성장


조 창업주는 1967년 7월 자본금 2억원으로 대진해운을 창립하고 해운업 진출의 기반을 다졌다. 그해 9월에는 베트남에 투입된 인원과 하역장비·차량·선박 등에 대한 보험료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동양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를 인수했다. 1968년 2월에는 한국공항, 8월에는 한일개발을 설립하고, 9월에는 인하공대를 인수했다.


이듬해인 1969년에는 만성 적자에 시달리던 국영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대한항공을 설립하며 본격적으로 항공사업에 뛰어들었다. 정상화 과정을 밟아가던 대한항공은 1973년 10월 발생한 중동전으로 위기에 빠진다.


당장 5000만달러가 필요한 조 창업주는 프랑스 소시에테 제네랄 은행에 도움을 요청하고, 업무상 인연을 맺었던 로제 총재에게 지불 보증을 부탁했다.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로제 총재는 조 창업주의 ‘신용’을 높이 사 흔쾌히 승낙했다.


조 창업주의 발길은 바닷길까지 향했다. 1977년 5월 육·해·공 종합수송 그룹의 완성을 위해 경영난을 겪고 있던 대진해운을 해체하고 컨테이너 전용 해운사인 한진해운을 설립했다.


한진해운이 정상궤도에 오르자 그는 조선업으로 눈을 돌렸다. 조 창업주는 법정관리 절차를 밟던 조선공사를 인수해 1989년 5월 한진중공업을 출범시켰다.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가 제주 비행훈련원을 방문해 훈련생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한진그룹

◆인재양성 통해 기업의 사회적 역할 다해야…사재 털어가며 지원


조 창업주는 기업이 사회 복지 증진을 위해 기여할 방법 중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은 바로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믿었다. 1968년 인하학원을 인수하고, 1979년에는 한국항공대학교를 인수해, 학교시설의 확충과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해 최대한 재정 지원을 했다.


특히 정석고등학교는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돌산을 깎아 교사를 건립했다. 이밖에도 정석교육상과 정석장학금 제도를 통해 우리나라 교육발전에 이바지했다. 또 1988년부터 가정 형편상 대학 진학의 기회를 얻지 못한 직원들을 대상으로 국내 최초의 사내 산업대학인 한진산업대학을 개설했다.


그는 생전에 모은 사재 가운데 약 1000억원을 공익재단과 그룹 계열사에 기부하고 그 중 500억원은 수송·물류 연구발전과 육영사업기금으로 학교법인 인하학원과 정석학원·재단법인 21세기한국연구 등 세 곳에 배분했다.


◆“국익 위해 손해 부담할 수 있어야”…국민 경제와 조화 강조


조 창업주는 평소 “사업은 예술과 같다”고 했다. 예술가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창조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기업가도 예술가의 신념과 노력으로 사업에 전념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는 또 기업은 반드시 ‘국민 경제와의 조화’라는 거시적 안목에서 운영해야 하고, 눈앞의 이익보다는 국익을 위해 기업이 일정 부분의 손해도 부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부실덩어리였던 대한항공공사, 대한선주와 같은 공기업을 인수하게 된 이유도 그의 경영철학이 바탕이 돼서다.


조 창업주는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 등 우리나라의 경제 및 외교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민간 외교관으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수교훈장 광화장을 비롯한 수차례의 훈장을 받았다.

이도영 기자 (ldy@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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