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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를 담고’, 좌절로 멈춘 숨결이 다시 피리 소리가 되기까지 [쇼트 시네마(170)]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6.09.02 10:36
수정 2026.09.02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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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 연출

넷플릭스서 서비스

OTT를 통해 상업영화 뿐 아니라 독립, 단편작들을 과거보다 수월하게 만날 수 있는 무대가 생겼습니다. 그중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부터 사회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메시지까지 짧고 굵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50분 이하의 영화들을 찾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무기력한 일상을 보내던 피리 연주자 수현(이아휜 분)은 신내림을 앞둔 친구의 내림굿에서 반주를 맡게 된다. 피리를 손에 쥔 수현은 좀처럼 제대로 연주하지 못한다. 굿이 진행되고 피리를 불 때마다 애써 밀어두었던 과거가 불쑥 끼어들고, 손은 떨리고 음은 빗나간다.


한때 수현에게 피리는 무엇보다 좋아하는 것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수련회에서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방문을 잠그고 옷장 안에 들어가 홀로 피리를 불 정도였다. 그러나 좋아하는 마음이 클수록 좌절 역시 깊었다. 면접을 보러 가던 날 우연히 만난 동창의 가방에서 ‘숨결’이라는 제목의 악보를 발견한 수현은 이후 자신이 응시한 블라인드 면접장에서 같은 악보를 마주한다.


'서를 담고' 스틸ⓒ

공정한 경쟁이라고 믿었던 자리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다. 치열하게 연습하고도 자신의 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벽과 맞닥뜨린 경험은 피리를 향한 애정을 상처로 바꿔놓는다.


현재의 굿판과 과거의 기억은 피리 소리를 매개로 계속 뒤섞인다. 연주하려 할수록 과거가 떠오르고, 과거에 붙들릴수록 피리는 제대로 된 소리를 내지 못한다. 결국 무당은 수현에게 속이 텅 비었으니 연주가 그 모양이라며 화를 내고 굿을 중단한다.


피리를 내려놓고 그곳을 떠나려던 수현은 그제야 자신이 외면해온 시간을 다시 바라본다. 피리를 너무 좋아해서 숨어서까지 불었던 자신,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연습했던 자신, 그리고 그만큼 크게 무너졌던 자신이다.


이후 다시 시작된 굿에서 수현의 연주는 이전과 달라진다. 과거를 완전히 떨쳐냈기 때문이라기보다 더 이상 그 기억을 피해 달아나지 않기로 한 것에 가까워 보인다.


영화가 내림굿이라는 공간에 수현을 데려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친구에게 굿이 자신의 삶을 계속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라면, 수현에게 피리 역시 마음먹는다고 간단히 끊어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가장 좋아했던 것이 자신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그것을 버리고 살아가는 동안 수현의 삶 역시 함께 멈춰 있었다.


때문에 수현이 다시 피리를 부는 장면은 흔히 말하는 꿈의 회복이나 재도전과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현실에서 달라진 건 없지만, 자신이 무엇을 할 때 가장 자기 자신에 가까워지는지를 다시 확인한다.


이러한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것이 악보의 제목 ‘숨결’이다. 수현에게 결정적인 좌절을 남긴 순간에 등장한 악보가 하필 ‘숨결’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피리는 연주자의 숨이 악기 안으로 들어가야 소리가 난다. 수현은 피리를 포기하면서 연주만 멈춘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뜨겁게 살아 있던 순간의 호흡까지 함께 눌러놓은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 수현이 다시 피리를 분다는 것은 멈춰 있던 자신의 숨을 다시 밖으로 내보내는 일이기도 하다.


제목인 ‘서’(舌) 역시 이와 연결된다. 서는 피리에 끼워 사용하는 부속물로, 연주자의 입김을 받아 진동하며 소리를 만들어내는 핵심적인 부분이다. 연주 전 물에 적셔 사용하는 것도 특징이다.


여기서 ‘숨결’과 ‘서’는 서로 맞물린다. 과거의 ‘숨결’은 수현에게 피리를 놓게 만든 기억으로 남았지만, 마지막의 수현은 다시 자신의 숨을 피리 안으로 밀어 넣는다. 서는 그 보이지 않는 숨을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바꾼다.


손등의 상처를 둘러싼 이미지도 이 과정과 맞닿아 있다. 과거의 상처를 다시 들춰내려는 수현을 막고 무당이 붉은 물감을 대신 손등에 발라주는 순간, 영화는 상처를 없애거나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으로 만드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렇게 수현은 상처를 품은 채 다시 숨을 불어넣는다. 피리의 ‘서’가 숨을 소리로 바꾸듯, 수현 역시 오랫동안 자신을 짓눌러온 기억을 통과해 마침내 자기만의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러닝타임 15분.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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