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비명 쯤은 ‘노이즈 캔슬링’ [쇼트 시네마(171)]
입력 2026.09.03 15:24
수정 2026.09.03 15:24
최지혜 감독 연출
넷플릭스서 서비스
OTT를 통해 상업영화 뿐 아니라 독립, 단편작들을 과거보다 수월하게 만날 수 있는 무대가 생겼습니다. 그중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부터 사회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메시지까지 짧고 굵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50분 이하의 영화들을 찾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택배 일을 하던 미주(석희 분)는 팔을 다친 뒤 산업재해 처리를 두고 회사와 갈등을 겪는다. 몸을 다친 것보다 그를 더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이후의 일이다. 문제를 제기했다가 회사에서 해고되는 것은 아닐지 걱정하고, 노무사는 여기서 물러나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며 미주를 안심시킨다. 그러나 생계가 걸린 미주에게 옳은 선택과 안전한 선택은 좀처럼 일치하지 않는다.
설상가상 밤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명소리가 미주를 괴롭힌다.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반복되는 소리에 이웃을 찾아가지만 한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다른 사람은 이어폰을 낀 채 미주의 말을 듣지 못한다. 경찰에 신고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출동한 경찰은 비명의 정체보다 미주의 상태를 의심하고, 미주는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서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으로 취급된다.
ⓒ'노이즈 캔슬링' 스틸
아무도 자신이 듣는 소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자 미주는 창문을 가리고 귀에 청테이프까지 붙인다. 그래도 비명은 사라지지 않는다. 온라인 동네 커뮤니티에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있는지 묻던 미주는 모스라는 이용자를 알게 된다. 모스 역시 이상한 소리에 시달리고 있다며 1년 전 이곳에서 사고가 있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끝내 병원을 찾은 미주에게 의사는 청각이 지나치게 예민해진 상태라며 보라색 약을 처방한다. 청력을 일부 떨어뜨리는 약을 먹자 마침내 비명이 사라진다.
잠을 푹 자게 된 미주는 이전의 일상을 되찾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필요한 소리까지 듣지 못하기 시작한다. 회사 앞에서 노동자들이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자신을 돕던 노무사의 연락도 미주에게 닿지 않는다.
그 사이 회사는 택배기사는 개인사업자이기 때문에 산재 처리가 어렵다며 합의를 제안하고, 미주는 이를 받아들인다. 이후 미주는 자신처럼 소리에 시달린다는 모스와 직접 만난다. 자신에게 효과가 있었던 약을 건네지만 예상하지 못한 사실을 알게 된다. 모스는 애초에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농인이었다.
미주는 다시 조용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어느 날 그가 평온하게 잠든 사이 창밖으로 한 여성이 추락하는 실루엣이 스쳐 지나간다. 미주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채 계속 잠들어 있다.
‘노이즈 캔슬링’은 초반에는 산재 문제와 정체불명의 비명이라는 서로 다른 두 사건을 병렬적으로 펼쳐놓는다. 그러나 미주가 청력을 낮추면서 두 이야기는 하나로 맞물린다.
처음의 미주는 자신의 고통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사람이다. 회사와 산재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으며, 밤마다 들리는 비명을 호소해도 이웃과 경찰은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미주는 자신을 괴롭히는 소리를 차단하면서 반대편에 서게 된다. 이제 다른 노동자들의 외침이 미주에게 들리지 않는다.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단순한 청각의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의 고통이 자신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는 일이다. 미주가 얻은 고요는 문제가 해결돼 찾아온 평온이 아닌, 외면의 결과다.
이어폰과 청테이프, 보라색 약 등 영화 속 사람들은 타인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공격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그저 저마다 자신의 세계에 집중하고, 불편한 소리를 차단한다. 그렇게 무관심은 악의가 없어도 만들어진다.
모스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영화는 비명의 의미를 다시 뒤집는다. 미주와 마찬가지로 소리에 시달린다고 했던 모스는 농인이다. 그렇다면 그가 괴로워했던 소리는 무엇이었을까. 환청에 가까워 보인다.
재미있는 점은 이웃 여성들과 경찰, 의사를 한 배우가 연기한다는 것이다. 미주가 도움을 청할 때마다 장소와 직업은 달라지지만 비슷한 얼굴과 마주하는 셈이다. 어디로 가든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미주의 상황을 시각적으로 반복한다.
동시에 이 장치는 관객에게도 작동한다. 동일한 얼굴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관객 역시 눈앞의 타인을 무심히 지나친 셈이다. 영화는 그렇게 관객까지 무관심의 구조 안으로 끌어들인다.
무엇보다 ‘노이즈 캔슬링’의 공포는 밤마다 들리는 비명의 정체보다 그 비명이 마침내 들리지 않게 되는 순간에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미주가 평온하게 잠들고, 창밖에서는 한 사람이 추락한다. 한 사람의 평온과 다른 사람의 고통이 같은 화면 안에 존재하지만 둘 사이를 연결해줄 소리는 이제 없다.
산재 문제 역시 이 결말과 맞닿는다. 미주의 부상 또한 처음에는 누군가 들어줘야 하는 하나의 목소리였다. 노무사는 미주가 물러나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미주가 합의를 택하면서 자신의 문제는 당장의 선에서 정리되고, 다른 노동자들의 외침 역시 그의 세계 밖으로 밀려난다.
영화는 이를 미주의 이기심으로 간단하게 결론 내리지 않는다. 자기 삶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찬 개인이 불편한 소리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마음부터 보여줬기 때문이다. 미주에게 귀를 닫는 것은 처음에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문제는 그 평온의 대가로 무엇까지 들리지 않게 되었느냐다. 세상은 여전히 비명들로 가득하지만, 자의적으로 귀를 막은 채 타인의 관심에 무관심한 현실이 섬뜩하게 느껴지는 영화다. 러닝타임 21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