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사건, 네 개의 시선…어른을 위한 잔혹동화 ‘블랙메리포핀스’ [헬로스테이지]
입력 2026.08.10 14:53
수정 2026.08.10 14:53
한스 헤르만 요나스 안나 등...네 개 버전 연이어 공연
인간은 감당하기 힘든 트라우마를 맞닥뜨렸을 때 기억을 베어내려 한다. 그러나 상처를 오려낸 자리는 치유가 아닌 결손으로 남는다. 지워진 기억 위에서 연명하는 평화는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에 불과하다.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는 위태로운 평화를 스스로 깨뜨리고, 상처를 직시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다.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 ⓒ
‘블랙메리포핀스’는 2012년 초연 이후 7번의 시즌을 거치면서 두터운 팬덤을 보유한 작품이다. 올해 8번째 시즌으로 돌아온 이 작품은 영국의 아동문학가 패멀라 린던 트래버스가 1934년 발표한 소설 ‘메리 포핀스’에서 모티브를 얻어 잔혹 동화 스타일로 재해석했다.
1926년 독일, 저명한 심리학자 그라첸 박사의 대저택에서 화재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의 피의자로 지목된 유모 메리 슈미트, 그리고 극적으로 살아남았으나 당시의 기억을 전부 잃은 네 명(한스, 헤르만, 요나스, 안나)의 아이들. 12년의 세월이 흐른 뒤, 변호사가 된 맏형 한스는 다시 동생들을 불러 모아 그날의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작품은 닫혀 있던 기억의 문을 열어젖히는 과정에 집중한다. 한스는 고통을 감내하더라도 무조건 진실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가 동생들의 불안과 거부감을 무릅쓰고 12년 전 잿더미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유는 분명하다. 기억을 잃은 상태로 얻은 안락함은 허구이며, 이를 바로잡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극은 ‘행복을 위한 망각’과 ‘고통을 동반한 기억의 수용’을 대비시킨다. 유모 메리는 아이들을 비극의 충격에서 보호하기 위해 최면술로 기억을 지워버렸다. 메리의 행위는 헌신적인 사랑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이들이 자신의 과거를 직시할 기회를 박탈한 셈이다.
무대 위 네 명의 인물들은 네 갈래로 파편화된 기억을 하나씩 맞춰가며 잔혹한 진실에 다가선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물들의 심리적 균열은 군더더기 없는 서사와 정교하게 계산된 오케스트레이션을 통해 조용히 조여온다. 자극적인 연출이나 화려한 볼거리에 의존하지 않고, 밀폐된 공간 안에서 인물들이 겪는 내면의 파동만으로 긴장감을 유지한다.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 ⓒ쇼노트
기억이 온전히 복원되는 순간, 아이들은 더 이상 과거의 피해자에 머물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기억 역시 자신이 통과해 온 삶의 엄연한 일부임을 인정하고, 비로소 독립된 주체로 바로 선다. 흉터를 억지로 지우는 대신, 흉터를 끌어안은 채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블랙메리포핀스’는 비극을 감상적인 눈물로 끝내지 않는다. 아픔을 직시하는 인물들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 구원하는 방식이 무엇인지 묵직하게 전달한다. 고통을 빼놓고는 진정한 자신을 완성할 수 없다. 잿더미 속에서 네 명의 아이가 마침내 찾아낸 것은 지워졌던 어제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어둠을 뚫고 걸어 나갈 내일의 용기다.
이번 시즌의 가장 큰 특징은 그간 시즌마다 따로 공연되던 네 가지의 버전을 연이어 올린다는 점이다. 사건을 바라보는 네 아이의 시선을 각각 중심에 두고 총 네 가지 버전으로 나뉘어 연달아 공연하면서, 동일한 화재 사건과 트라우마를 다루지만 어떤 인물의 눈으로 진실에 접근하느냐에 따라 중심 서사와 인물 간의 심리적 방점이 달라지며 극을 입체적으로 완성한다.
첫 번째 버전인 ‘한스-메리 포핀스 살인 사건을 위한 변호’는 지난 6월 18일부터 7월 12일까지 공연했고, ‘헤르만-모래 사나이가 나오는 꿈’은 7월 17일부터 8월 9일까지 관객을 만났다. 세 번째 버전인 ‘요나스-숲의 기억’은 8월 14일부터 23일까지, 마지막 완결판인 ‘안나의 방-두 개의 책상’은 8월 28일부터 9월 6일까지 대학로 링크아트센터 벅스홀에서 공연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