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카카오톡
블로그
페이스북
X
주소복사

수술대에서 내려온 의료관광: 한국이 파는 ‘돌봄의 동선’ [김희선의 글로벌 K컬처 이야기 ㉖]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6.08.07 14:00
수정 2026.08.07 14:00

올해 상반기 외국인 약국 결제약, 전년 대비 1176.9% 폭증

한방 의료 결제액 역시 전년 대비 193% 증가

명동의 한 약국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쇼핑바구니를 든 외국인들이 진열대를 훑고, 매대에는 영어·중국어·일본어 가격표가 나란히 붙어 있었습니다. 몇 걸음 옆 피부과에는 다국어 코디네이터가, 골목 안쪽 한의원에는 침을 맞고 나온 여행객이 보였습니다. 언젠가부터 관광지의 풍경 안에 진료가 자연스럽게 섞여 들었습니다.


ⓒ옵티마 웰니스 공식홈페이지

올해 상반기 방한 외국인이 국내 의료기관에서 결제한 금액은 1년 전보다 98% 늘어, 숙박과 유통을 제치고 전 업종 1위를 기록했습니다. 2024년 상반기만 해도 성형외과 비중이 46%로 피부미용을 크게 앞섰지만, 올해는 피부미용 67.5% 대 성형외과 21.3%로 격차가 세 배 이상 벌어졌습니다. 수술대에 오르는 여행이, 가벼운 시술이나 진료를 받고 다음 일정을 소화하는 여행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 흐름을 가장 먼저 보여준 곳은, 뜻밖에도 한국인에게 가장 일상적인 공간인 약국이었습니다. 올 상반기 외국인의 약국 결제액은 전년 대비 1176.9% 폭증하며 전 진료과목 중 증가율 1위에 올랐습니다. ‘올리브영·다이소·무신사’로 불리던 필수 코스에 약국이 합류했고, 명동 을지로입구역에서 명동역 사이에만 외국인을 겨냥한 약국이 30여 곳에 달합니다.


붐비는 명동의 약국이 신호탄이었다면, 성수와 이태원에는 ‘큐레이션 약국’과 ‘웰니스 뮤지엄’을 표방하는 프리미엄 플래그십이 잇달아 문을 열고 있습니다. 전문 약사가 컨디션에 맞춰 제품을 골라주는 이곳은, 단지 ‘구매’의 장소였던 약국을 ‘선택과 경험’의 공간으로 바꿔놓습니다. 소박한 동네 약국이 라이프스타일 공간으로 변신하는 중입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성장세를 보여준 영역은 한국의 가장 오래된 얼굴, 한방입니다. 한방 의료 결제액은 전년 대비 193% 늘었고, 미국 등 서구권 여행객은 한의원을 ‘미용’이 아닌 ‘건강관리’의 공간으로 찾기 시작했습니다. 침과 약침, 한방차 체험 영상이 SNS를 채우고, 지난해 '케데헌'에서 루미가 한의원을 찾던 장면을 이제 세계의 여행객이 현실에서 재생합니다. 가장 소박한 것과 가장 오래된 것이 나란히 한국 여행의 관문이 되었습니다.


흩어진 현상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선으로 꿰어집니다. 피부과에서 시술을 받고, 약국에서 연고를 사고,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숙소로 돌아가 온갖 팩을 붙이는 하루. 외국인이 사가는 것은 시술 한 건이 아니라 ‘관리받는 나’라는 이름의 동선입니다. 성형이 한 번의 극적인 변형을 팔았다면, 지금 한국이 파는 것은 매일의 관리와 돌봄입니다.


ⓒ생활한방연구소 공식홈페이지

과거의 의료관광이 병원 하나와 유치업체의 패키지에 머물렀다면, 지금은 선택지가 다양해진 만큼 관광객이 스스로 하루를 엮어갑니다. 그런데 그 자유로움이 진짜 자생적인 것인지, 아니면 잘 설계된 또 다른 패키지가 만든 착시인지는 다른 문제점입니다. 이 차이가 곧 한국이 ‘패키지를 파는 나라’에 머물지, ‘여행자가 스스로 큐레이션하는 나라’로 올라설지 결정하는 양적 성장과 질적 성숙의 분기점이기 때문입니다. 지표는 조심스럽게 후자의 손을 들어줍니다. 올 상반기 결제 건수 증가율이 결제액 증가율을 앞지르며, 소수의 ‘큰손’ 중심에서 보통 관광객의 일상적 라이프스타일로 저변이 넓어졌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 한국 여행의 승부처는 실력 있는 성형외과 원장 한 명이 아니라 예약과 통역, 시술과 약국, 한방과 사후관리로 이어지는 ‘연결된 생태계’에서 판가름 납니다. 해외 파트너들이 출장을 오면 일정에 시술과 약국, 한방 체험이 당연한 듯 들어갑니다. 얼마 전 만난 한 해외 파트너는 하루 일정을 마치고 제게 물었습니다. "이 관리 동선을 통째로 우리 도시에 옮겨올 수는 없을까요?" 그가 탐낸 것은 특정 병원이 아니라, 한국이 구축해 놓은 ‘돌봄의 흐름’ 전체였습니다.


더 근본적인 변화는 소비의 성격에 있습니다. 성형이 일회성 고액 거래였다면, 관리와 돌봄은 반복과 재방문, 재구매의 언어를 씁니다. 명동에서의 한 번의 경험은 귀국 뒤에도 한국 화장품·의약품·건강기능식품 재구매로 이어지고, 시술 한 번이 평생 소비의 입구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의 의료관광을 단순한 매출이 아니라 ‘고객 획득’의 장면으로 읽습니다.


성형은 거래였고, 관리는 관계입니다. 그 관계는 비행기가 이륙한 뒤에도 국경 밖에서 이어집니다. 관광객이 스스로 엮어가기 시작한 이 자생적인 흐름을, 이제는 더 넓고 탄탄하게 키워낼 차례입니다. 여정의 이음새를 촘촘히 메우고, 명동과 성수를 넘어 더 많은 골목까지 이 경험을 확장하며, 여행자가 제 손으로 더 깊고 오래 관계를 맺도록 길을 터주는 방향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느슨한 흐름이 단단한 생태계로 자랄 때, 한국은 관광객의 숫자가 아니라 관계의 깊이로 성장하는 나라가 됩니다. 약국의 작은 쇼핑바구니와 한의원의 침 한 대에서 시작된 이 여정은 이미 그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김희선 Team8 Partners 대표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댓글 0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