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거울” vs “창작 가뭄의 도피처”…연극계 ‘고전 열풍’의 두 얼굴
입력 2026.06.24 09:23
수정 2026.06.24 10:21
박근형 "좋은 연극 보여주기 위해 4년간 고전 무대 올라"
이기영 "고전 끄집어내기, 시대와 맞지 않아"
올여름 국내 연극 무대가 고전 희곡으로 채워지고 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부터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까지 시대와 국경을 넘어 생명력을 유지해 온 작품들이 잇달아 막을 올린다.
연극 '베니스의 상인' ⓒ파크컴퍼니
무대에 오르는 배우들의 면면도 중량감이 있다. 신구, 박근형, 박정자, 남명렬 등 원로 거장들과 최수종, 전미도 등 베테랑 배우들이 대거 합류하며 대중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에 앞서 올 상반기에도 안톤 체호프의 고전을 재해석한 국립극단의 ‘반야 아재’와 LG아트센터의 ‘바냐 삼촌’ 등이 공연한 바 있어, 고전 연극의 강세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고전 열풍은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 본연의 질문들을 ‘지금, 여기’의 관점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로 평가받는다. 고전은 이미 검증된 완성도를 바탕으로, 시대적 변화에 따라 새로운 메시지를 도출할 수 있는 단단한 뼈대가 되기 때문이다.
고전 열풍의 중심에는 정체된 한국 연극계에 경종을 울리려는 원로 배우들의 문제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배우 박근형은 ‘고도를 기다리며’ ‘베니스의 상인’ 등 고전 무대에 계속 서는 이유에 대해 “우리나라의 위상이 세계적인데 불행히도 창작극이 부실하다. 소설은 노벨상도 받는데 연극계는 그런 것이 없다. 희곡을 일으켜 세우려는 움직임이 너무 없다”고 지적했다. 또한 “연극에 다시 돌아와 보니 50, 60년 전과 거의 변함이 없었다”며 “좋은 연극을 보여주기 위해 정통극을 선택해 4년 가까이 무대에 서고 있다”고 밝혔다. ‘베니스의 상인’의 오경택 연출가 역시 고전이 “돈과 사랑이란 보편적인 이야기로 시작해 정의는 무엇인가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며 그 예술적 가치를 짚었다.
앞서 ‘반야 아재’에 이어 ‘오이디푸스’를 공연하는 남명렬 역시 “고전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운명뿐 아니라 인간의 고뇌를 아주 적나라하고 극명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며 “객석에 있는 관객들은 고전을 보면서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삼는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은 계속 공연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이디푸스’를 이끄는 서재형 연출도 “아주 오래된 고전이지만 충분히 현대 관객에게도 닿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화려한 무대 뒤편에는 신작 희곡의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고전을 선택해야만 하는 구조적 한계가 존재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새로운 창작극을 발굴하고 무대에 올릴 수 있는 토양이 부실하다 보니, 제작비 부담과 흥행 실패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인지도가 높고 저작권료 부담이 적은 고전으로 눈을 돌린다는 분석이다.
연극 '오이디푸스' 연습현장 공개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개최한 ‘문화예술정책자문위원회 연극 분과 제3차 회의’에서도 이러한 고전 의존증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다. 회의에 참석한 배우 이기영은 무대에 올릴 마땅한 작품이 없어 고전에 집착하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새 작품을 찾기가 정말 어렵다. 공연이 되더라도 작가료를 받기가 쉽지 않으니, 좋은 작가들이 연극계를 떠난다”면서 “자꾸 고전을 끄집어내는데, 사실 이런 작품들은 시대적으로 맞지도 않고 재미도 없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국공립 단체마저 민간의 흥행 방식을 답습하고 있다는 목소리도 높다. 박정미 파크컴퍼니 대표는 “국공립 단체는 해외 고전이나 스타 마케팅 등 민간과 동일한 제작 방식을 지양해야 한다”고 지적하며 공공극장이 신진 창작자 발굴과 실험적 시도의 방패막이가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결국 고전 열풍이 지닌 참된 가치는 창작 생태계의 복원과 맞물려 있다. 고전의 재해석이 예술적 성취로 온전히 인정받기 위해서는 신작 창작극이 끊임없이 탄생하는 건강한 토양이 선행되어야 한다. 고전 중심의 라인업이 창작 환경 위축에 따른 생존 전략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문체부가 밝힌 연극 창작 지원 예산 확대와 민간 극단 대상의 대관료 지원 방침은 현장의 갈증을 해소할 실질적 발판으로 주목받고 있다. 정부의 제도적 지원을 통해 신작 창작 여건을 개선하고, 이를 바탕으로 풍요로운 고전의 가치와 새로운 창작의 도전이 무대 위에서 공존하는 것이 한국 연극계가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생태계 모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