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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보이 임금 – 문정왕후와 명종 [정명섭의 실록 읽기㉞]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6.04.14 14:06
수정 2026.04.14 14:06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얘기는 삼국시대 신라의 선덕여왕을 두고 한 말이었다. 정확하게는 여성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고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킨 비담과 염종이 내세운 명분이었다. 그런데 삼국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조선시대에 무려 ‘여자 임금’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권세가 강했던 여성이 있었다. 바로 인종의 새어머니이자 명종의 친어머니인 문정왕후 윤씨였다.


사창덕궁 선정문ⓒ 직접 촬영

서기 1501년 파평 윤씨 윤지임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1517년 중종의 새로운 부인으로 간택된다. 중종에게는 원래 신수근의 딸인 단경왕후라는 부인이 있었다. 하지만 반정을 일으켜서 중종을 옹립한 공신들의 반대에 못 이겨 단경왕후를 폐해야만 했다. 신수근이 연산군의 장인이자 측근이었기 때문이다. 공신들의 등쌀에 못 이겨 단경왕후를 쫓아낸 중종은 파평 윤씨 집안 윤여필의 딸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인다. 그녀는 중종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하나 낳지만 산욕열로 인해 20대 초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중전 자리는 비어있을 수 없기 때문에 세 번째 부인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가장 강력한 후보는 이미 복성군이라는 아들을 낳은 경빈 박씨였다. 하지만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신하들이 반대했고, 결국 이번에도 명문가인 파평 윤씨 집안에서 새롭게 부인을 맞이했고, 그녀가 바로 문정왕후였다.


문정왕후의 임무는 명확했다. 경빈 박씨를 비롯한 후궁들의 등쌀에서 두 번째 부인이자 먼 친척인 윤씨의 아들인 인종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 당시 벌어진 일들을 암투라고 표현하기 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만약 패배하면 자기는 물론 아들과 일가친척들까지 모두 사약을 마시고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정왕후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인종의 친척인 김안로와 손잡고 경빈 박씨와 그녀의 아들 복성군을 저 세상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꿈에도 그리던 아들을 낳으면서 상황이 다시 변하고 만다. 이제 인종이 복성군 포지션이 되어버린 것이다. 문정왕후는 자신의 동생인 윤원형을 내세워서 김안로를 견제했다. 이들을 소윤이라고 불렀는데 대윤은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이었다. 대윤과 소윤이 손을 잡고 김안로를 숙청하는데 성공한다. 이제 남은 건 양쪽의 대결이었다. 차기 왕위 계승권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기 때문에 양쪽의 대립은 치열했다.


풍문에 의하면 간사한 의논이 비등하여 ‘윤임을 대윤(大尹)이라 하고 윤원형을 소윤(小尹)이라 하는데 각각 당여를 세웠다.’ 합니다.


서기 1543년 중종 38년 2월 24일자 실록에 나온 이 내용은 강릉부사였다가 대사간에 임명되어서 조정에 돌아온 구수담이 한 말이다. 윤임과 윤원형이 각각 훗날 인종과 명종이 되는 세자와 대군과 가깝게 지내고 있다는 내용이다. 양쪽의 다툼이 심해지고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내용이지만 중종은 약간 심드렁하게 그런 얘기를 누가 하고 다니냐는 식으로 되묻는다. 건강도 좋지 않은 상황이고, 어차피 세자에게 물려줄 것이라 크게 문제 삼고 싶지 않는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다음 해에도 다른 신하가 양쪽의 다툼에 대해서 언급하지만 뭔가 조치를 취하기 전에 중종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세자였던 인종이 왕위에 오르지만 편치 않은 일들이 이어졌다. 야사에는 인종이 즉위한 이후 문정왕후가 아들의 손을 잡고 찾아가서 우리 모자를 언제 죽일 것이냐고 따져 묻기도 했다고 한다. 실제일 가능성은 낮지만 인종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곤혹스러운 상황임에는 분명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인종이 갑자기 승하하는 일이 벌어진다. 다음 왕위는 인종의 배다른 동생이자 문정왕후의 아들에게 돌아갔다. 이때 명종의 나이가 11살이었기 때문에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고,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칼을 뽑았다.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을사사화를 일으켜서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을 비롯해서 그의 측근들을 모조리 제거해버린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양재역 벽서 사건을 빌미로 남은 반대파도 숙청해 버렸다.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라고는 했지만 보통 수렴청정을 하는 어머니는 전면에 나서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문정왕후는 수렴을 걷고 밖으로 나와버린 것이다. 수렴청정이 끝난 이후에도 문정왕후는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그래서 명종 20년인 서기 1565년 4월 6일 그녀가 창덕궁 소덕당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사관은 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남겼다.


주상에게 ‘너는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으랴.’ 하고,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곧 꾸짖고 호통을 쳐서 마치 민가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대하듯 함이 있었다. 상의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김없이 받들었으나 때로 후원의 외진 곳에서 눈물을 흘리었고 더욱 목놓아 울기까지 하였으니, 상이 심열증을 얻은 것이 또한 이 때문이다.





정명섭 작가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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