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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승의 역사 너머 역사㉟] 더 이상 ‘의병전쟁’이라고 부르지 말자

데스크 null (desk@dailian.co.kr)
입력 2021.06.29 14:01
수정 2021.06.29 10:12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의병 관련 한 장면


드라마에서 의병은 그저 ‘의로운 군대’일 뿐이다. 보통은 정의롭지만 힘없는 민초들이 모인 그렇고 그런 군대처럼 묘사된다. 실제로 그랬을까? 의병의 게릴라 전술은 당시 일본에게 심각한 위협이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일본 육군은 러시아를 주요 적국으로 상정했다. 이 때문에 연해주에 주둔한 러시아군을 대비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조선에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켰고, 특히 함경도 쪽에 병력을 집중했다.


그러나 의병 때문에 일본은 러시아군만이 아니라 후방 보급까지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의병은 일본군의 작전에 필요한 각종 시설, 이를테면 전신선이나 초소, 보급품을 공격했고, 때에 따라서는 지역을 점령하고 농성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일본군은 의병 활동에 대응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병력을, 점점 더 넓은 지역에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소모전의 늪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은 일본군에게 상당한 타격을 안겨주었다. 단적인 예로, 어떤 지역에서 의병 활동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일본군은 그 일대 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의 모든 집, 모든 방을 다 뒤져야 했다. 의병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의병에게는 화장실, 곳간, 저장소 등 숨을 수 있는 모든 곳이 은신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군은 마을 곳곳을 찾아다녀야 했다. 가장 안전한 은신처는 군중 속이었다. 무기를 버리고 사람들과 섞여 있으면, 이들중에서 의병을 가려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일본군이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점차 궁지에 몰린 일본군은 해서는 안 되는 짓까지 벌이기 시작했다. 바로 민간인 학살이다. 일본은 1899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면서 민간인 학살을 금지하는 협약에 조인했다. 저항하지 않는 민간인은 정당한 사유가 없다면 임의로 공격하지 않겠다고 국제 사회와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의병을 힘만으로 억누를 수 없자, 결국 민중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의병 활동이 활발한 지역에서는 지나다니는 사람까지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일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총포화약류취체령’을 임의로 제정하여 총이나 칼처럼 생긴 것을 가지고 있으면 불시 검문을 진행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에는 처벌할 수 있도록 하였다. 어떤 동네에서는 식칼까지 관청에 걸어두고 일본군의 허락을 받은 다음에 가져가도록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민중은 의병을 숨겨주었다. 심지어 의병에 가담했다. 일본군이 어떻게 나올지 뻔히 알면서도 제천에서, 각 지역에서, 그리고 서울까지 어느 한 곳을 특정할 수가 없을 정도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이들은 단순히 벌떼 모이듯이 누군가 깃발을 들자 따라온 것이 아니었다. 일본을 우리 영토에서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한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의병은 자신들이 어떤 위험에 처할지 알면서도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그 한 발은 또다른 한 발이 되고, 계속된 발걸음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발걸음은 결국 하나의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심지어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 병합된 이후에도 이러한 발걸음은 계속되었다. 국내에서 활동이 어려워지자 국외까지 나가서 그 의지를 이어 나갔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인석, 홍범도 등 수많은 사람이 그런 의지를 가슴에 품고 국내외에서 의병 활동을 했다. 의병은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의병이 단순히 민중의 저항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그 영향이 또 다른 연쇄반응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들의 활동은 이후 다른 이들이 걷는 길의 지표가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독립운동은 이러한 의병 활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당시 국제 정세와 맞물리며 일제의 후방을 위협하는 단초를 마련하기도 했다.


지역 패권주의를 점점 더 강화하던 일본은 결국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점차 의병 탄압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극단을 보여주는 것이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일본군이 전라남도 일대의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해군까지 동원해 수행한 ‘남한대토벌작전’이다. 일본이 대륙 침략을 비롯하여 지역 패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교두보라고 할 수 있는 한반도에 대한 안정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일본군의 만행은 아무리 전쟁 상황임을 내세운다 해도 범죄라는 사실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민간인 학살은 일본군의 ‘교반전술’(攪拌戰術)이라는 작전 계획 하에 자행되었다. 일본군은 의병이 민중 속에 섞여 있다는 전제하에, 풀숲에 숨어 있는 뱀을 끌어내기 위해 나뭇가지로 풀숲을 치듯이 민중을 위협하였다. 사실상 그 지역의 민중은 일본군에게 인질로 잡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것이 남한대토벌의 실상이다. 토벌 과정에서 엄청난 학살이 벌어졌다. 누군가는 이 사건을 제노사이드(genocide)라고 평가하고, 누군가는 이때 전라도에 사람의 씨가 말랐다고 이야기한다.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가 ‘남한대토벌작전’의 참혹한 상황만을 기억한다는 점이다. 사실은 평안도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고, 함경도와 강원도 등 각 지역에서도 유사한 작전이 펼쳐졌다. 남한대토벌작전은 관련 기록이 많이 남아있어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졌고, 교과서에도 실려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전국 어디든 의병 활동이 있었던 곳이라면 그와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다. 국권을 상실한 국민의 암울한 현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첨언하자면, 의병전쟁이라는 용어를 종종 사용했지만 더는 쓰고 싶지 않다. ‘전쟁’이라는 표현은 국가에 초점이 맞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국가 대 국가의 전투 상황임을 의미하여 자칫 일본의 행위를 전투 중 일어난 우발적 상황으로 정당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의병은 피탈 직전의 국권을 지키기 위한 민중의 ‘저항’이었고, 일제에 대한 ‘항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의병 ‘투쟁’ 혹은 ‘항쟁’이라고 이야기해야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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