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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승의 역사 너머 역사㉝] 대한제국의 일회용 무기 수입하기

데스크 null (desk@dailian.co.kr)
입력 2021.06.15 14:00
수정 2021.06.15 13:20

양무호ⓒ위키

고종에게 강군이란 ‘보여주기식’ 군대였고, 그런 군대를 사람들에게 특히 서양인에게 과시하고 싶어 했다. 당시 조선에 살던 외국인의 기록을 살펴보면 고종은 종종 수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대열을 지어 이동하는, 지금으로 따지면 퍼레이드를 매우 자주 열었다고 한다. 국군의 날 행사에서 볼 수 있듯, 이러한 퍼레이드는 언뜻 보기에는 대단히 위용이 넘치고 멋지지 않았을까? 취타대가 연주하는 음악과 함께 동양적인 웅장함도 담겨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퍼레이드의 중심에 자리한 고종의 위용은 정말 대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위용은 실제 군사력과는 정반대였다.

당시 전쟁 양상은 점차 군인들이 위용을 뽐내기보다는 은‧엄폐하는 방식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소총 제작의 정밀성이 높아지면서 강선총이 등장했고, 강선은 총알의 직진성을 극대화시켰다. 이로써 명중률이 극도로 높아졌고, 총알 한 방으로 사람 하나를 죽일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이 때문에 군인은 생존을 위해 몸을 낮추고 소산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여기에 기관총과 포탄의 위력이 증가하면서 이제는 가급적 넓은 공간에 흩어지는 것이 전쟁터에서 보다 생존을 좀더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퍼레이드처럼 함께 열을 맞추고 모여 있으면 한꺼번에 전멸 당할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퍼레이드는 군사 훈련의 한 부분이 될 수 없었다. 그저 보여주기 위한 행위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조선의 군대는 눈에 보이는 훈련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군사력을 발전시켰다. 대표적인 형태가 바로 양무함 도입이다. 양무함은 원래 영국의 운하 또는 강에서 석탄을 실어 나르던 운반선이었다. 이것을 일본이 수입하여 세토 내해에서 석탄 운반선으로 사용했다. 이 배를 1903년에 조선 정부에서 군함으로 도입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조선 정부에서 요구한 것이 전투력보다 위용을 자랑할 수 있는 배였기 때문이다.


양무함은 석탄운반선이었기 때문에 현재 화물선처럼 매우 큰 배였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내해 혹은 강에서 운항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원해 혹은 파도나 물살이 센 곳에서 다닐 수 있는 배가 아니었다. 그래서 크기에 비해 힘은 약했다. 요즘으로 치면 대형차에 소형차 엔진을 설치한 격이었다. 그런데 이 배에 온갖 무기를 설치하고, 만국기도 달았다. 화려함 같은 ‘보여주기식’ 위용만을 추구한 것이었다.


그 결과는 최악이었다. 군사비의 상당 부분을 투입하여 사들인 양무함은 초기에 움직이지도 못했다. 엔진 등을 고려하지 않은 잘못된 개조가 문제였다. 그렇게 겉보기에만 대형 군함처럼 만든 양무함은 결국 러일전쟁 때 일본이 빼앗아 다시 무기를 뜯어내고 운반선으로 활용했다.


고종을 비롯한 조선의 위정자들이 생각하던 무기는 그런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무기를 구매할 때 화려한 것, 눈에 잘 띄는 것에 지나치게 집중했다. 실제 전쟁 양상을 고려한 성능이나, 작전 운용 등을 고민하여 무기를 마련한 것이 아니라 주로 남들이 보기에 좋은 것에 군비를 집중했다.


특히 조선에서 주로 많이 사들인 것은 총이었다. 이런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많은 돈이 필요했다. 문제는 조선 정부에서 발행하는 돈이 외국에서는 거의 가치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가지고 있는 금괴 혹은 은괴를 지불했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보유하고 있는 금, 은도 별로 없었다. 원래 조선은 절약이 근본인 나라였다. 좋은 표현으로는 ‘선비의 나라’라고 부르지만, 재정이 부족하면 절약 정책을 쓰는 작은 나라였다. 심지어 금광과 은광이 있어도 일부러 캐지 않는 절약의 나라였다. 그래서 조선 정부가 갖고 있던 얼마 되지 않는 재정은 곧 고갈됐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그 무기들을 사들였을까? 조선은 미래 가치를 담보로 잡혔다. 대표적인 것이 은광, 금광 채굴권이다. 조선의 많은 지하자원 채굴권이 외국인에게 팔려나갔다. ‘노다지’라는 표현도 이때 생겨났다. 심지어 고종은 청일전쟁 직전 로스차일드 가문에 조선의 막대한 지하자원을 판매하기 위한 교섭을 진행하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청일전쟁으로 무산되었지만, 이때 교섭이 이것이 성사되었다면 상당한 문제가 지금까지도 이어졌을지 모른다.


이러한 지하자원 이외에도 조선이 갖고 있는 중요한 미래 가치가 하나 더 있다. 바로 관세이다. 나라 사이에 수출입을 하게 되면 각국 정부는 관세라는 걸 매긴다. 이렇게 관세를 부여하는 것은 주권국가의 당연한 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은 이러한 권리를 담보로 돈을 빌리고, 그 돈으로 무기를 구입했다.


여기서 또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정말 ‘총’만 구입한 것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최신식 프린터를 사놓고는 카트리지는 안 산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최신식 프린터인 만큼 처음에는 인쇄가 잘 된다. 하지만 곧 카트리지가 비었으니 교체하라는 경고가 뜬다. 그런데 카트리지가 매우 비싼 셈이다. 카트리지 즉, 소모품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돈이 더 필요했다. 마찬가지로 총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총탄과 총이 고장 나면 고칠 수 있는 부속이 더 필요했는데, 이 모든 필요들은 고스란히 비용으로 돌아왔다.


고종을 비롯한 조선의 당시 위정자들은 군사력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과시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과시를 통해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막연한 생각만으로 지하자원을 비롯해 관세까지 담보로 잡히며 계속해서 최신 무기라고 불리는 것들을 사들였다. 하지만 구매한 품목에는 당시에는 이미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후장식 소총의 초기 모델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은 온갖 종류의 총기를 사들였고, 이는 또 다른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켰다. 비유하자면 여러 회사에서 프린터를 구매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를 테면 A회사 레이저 프린터 1 대, B회사 레이저 프린터 1대 이런 식으로 2대의 레이저 프린터를 구매하면, 당연히 A회사에서 만든 프린터와 B회사에서 만든 프린터의 소모품은 서로 호환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을 호환성이라고 한다. 즉 조선이 여러 종류의 무기를 들여오면서. 탄약을 비롯한 부품의 호환성을 고려하지 않고 구매한 것이다. 비슷한 부속, 작은 나사 하나조차도 A회사에서 만든 총의 나사는 B회사가 만든 총의 부품으로 사용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A회사의 총은 총알만 다 쓰면 그다음부터는 벽걸이용 장식품이 되고 만다. 총알도 없고, 고장 났을 때 수리할 방법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총기 관리 문제가 있었다. 군 생활을 하면, 사격 이후 반드시 실시하는 것이 바로 총을 닦는 것이다. 사격을 하고 나면 총구 안쪽을 비롯해 총열 등에 찌꺼기가 쌓인다. 이것을 탄매라고 한다. 아무리 무연화약이라고 해도 연기가 적게 날 뿐 탄매가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제거하지 않으면 다음 사격 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탄매를 닦을 때도 그냥 닦아서는 소용이 없었다. 기름을 써서 닦아내야 깨끗해졌는데, 이 기름을 ‘강중유’라고 불렀다.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한말 무기 관련 수입 품목 중에는 ‘강중유’를 비롯한 관련 부품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사실상 ‘강중유’를 비롯한 총기 관리 용품을 거의 수입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총기를 말 그대로 일회용으로 생각했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것이 당시 한말 고종을 비롯한 위정자들이 생각하던 조선의 군비강화였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soothhistory@nahf.or.kr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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