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2020] 마침내 출려한 김종인…'통합당 바람' 불러일으키나
입력 2020.03.31 06:00
수정 2020.03.31 07:02
삼고초려 응해 자신감 떨어진 통합당에 출려
"16년 민주당 1당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냐"
출려 일성으로 패배주의 일소…정면승부 시사
김종인 미래통합당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이 황교안 대표의 삼고초려(三顧草廬)에 응해 흡사 공명과 같이 출려했다. 난세에 발을 다시 내딛은지 불과 사흘인데, 벌써부터 범상치 않은 메시지와 행보로 통합당 바람을 불러오려는 모습이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다.
문재인정권 출범 3년만에 민생경제 파탄 논란이 일자, 돌아선 바닥민심을 근거로 이번 4·15 총선을 정권심판의 호기라 여겼던 통합당은 최근 지역구 공천 번복과 미래한국당 비례대표 명부 사태 등을 겪으면서 자신감이 땅에 떨어졌었다.
통합당 일각에서는 "최악의 패배였다던 4년 전보다 의석 수가 더 줄어들 수 있다" "서울·수도권에서 이길만한 곳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오며 패배주의가 만연하려던 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종인 위원장이 나섰다. 패배주의가 번지려는 찰나에 중요한 것은 통합당에 자신감을 불어넣는 일이었다.
김 위원장의 출려일성은 "2016년을 한 번 돌이켜 생각해보라"며 "당시 민주당이 1당이 되리라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했느냐"였다. 스스로 관중과 악의에 비견했던 공명처럼, 2012년 대선과 2016년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던 자신의 과거 경력을 내세워 승리에의 자신감을 통합당에 불어넣은 것이다.
최대 승부처를 피하거나 비껴가자는 생각도 일축했다. 김종인 위원장은 30일 오후 TV조선 <이것이 정치다>에 출연해 "결국 우리나라의 유권자 분포를 놓고보나 의석을 놓고보나 (최대 승부처는) 수도권"이라며 "수도권에서 최대한의 의석을 차지하려 노력을 해야 한다"고 단언했다.
내부를 먼저 다독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통합당 일각에서는 황교안 대표가 김종인 위원장에게 지나치게 공을 들인다는 불만의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유비가 공명을 세 번째 몸소 찾아가려 하자 관우조차 참다못해 불만을 토로했다. 어렵게 모신 공명만 유비가 귀하게 여겨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자, 정작 조조군이 쳐들어왔을 때 장비가 "물로 불을 끄라"고 비아냥거릴 정도가 되기도 했다.
특히 서울 강남갑의 태구민(태영호) 후보와 심재철 원내대표 등 지도부 일부는 김 위원장이 총괄선대위원장으로 오기 전, 그와 티격태격한 과거가 있기도 했다.
내부 다독이기…태영호 곧바로 불러들여 만나
"태영호 당선도 내가 책임지겠다" 통크게 공언
'못살겠다 갈아보자' 비전에 여권 긴장감 역력
이러한 과거가 어떻게 작용할 것인지 시선이 쏠리는 상황에서 김종인 위원장은 '출려' 이튿날인 이날 곧바로 국회로 태 후보를 불러들였다. 태 후보를 만난 김 위원장은 과거 공천 때와 관련한 말은 일절 언급하지 않은 채 "상황에 대한 인식 염려를 많이 했다. 그런 부분을 해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할 것"이라며 "빨리 적응할 수 있는 자세를 키우고 자신감을 보여주면 유권자들이 비교적 안심하는 상황에서 투표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태 후보는 "크게 포용해 격려 말씀까지 해주시고, 선거에 필승할 수 있는 키포인트를 하나하나 알려주시니 정말 열심히 하겠다"고 화답했다. 김 위원장은 "내가 선대위원장으로서의 책임을 졌으니까 태 후보 당선도 내가 책임지겠다"고 공언했다. 내부 잡음 가능성부터 원천적으로 차단한 것이다.
전날 발표한 "못살겠다 갈아보자"고 초려를 찾은 유비에게 공명이 '천하삼분지계'라는 미래 비전을 제시하듯, 황교안 대표의 통합당에 선명한 선거 프레임을 제시했다는 평이 나온다.
주목되는 것은 더불어민주당 등 여권의 반응이다. 여권은 김종인 위원장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융단폭격을 퍼붓고 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김종인 위원장의 프레임을 향해 박병석 민주당 공동선대위원장은 "선거 구호는 70년 전 구호, 의료보험은 50년 전 말씀을 들고 나왔다며 "50~70년의 과거 퇴행적 모습"이라고 폄하했다. 이근형 민주당 전략기획위원장도 "정권에 대한 심판 욕구가 강할 때 투표율이 올라가는 현상이 있는데 이번 상황은 그런 것 같지 않다"며 "(김 위원장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이겠지만 국민들은 그렇게 보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 위원장은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1956년 신익희 대통령 후보가 내세웠던 구호인데, 최근에 와서 일반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심지어 코로나로 죽으나 굶어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맞받았다. 인위적으로 어떤 분위기를 만들거나 과거로 돌리려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의 목소리이며, 국민들의 자연스러운 비명 소리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실제로 박병석 위원장이나 이근형 위원장의 김종인 위원장을 향한 공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정치권 관계자는 많지 않다. 이러한 공격은 공명이 단신으로 오나라로 향했을 때 우번·보즐·설종·육적·엄준·정병 등이 달려들었던 것과 같아, 애초부터 맞상대가 되는 급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치권의 시선은 청와대를 향하고 있다. 공명의 출려와 김종인 위원장의 총괄선대위원장 수락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조조는 출려 직후의 공명을 일개 촌부로 여겼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김 위원장의 능력을 겪어봤으니만큼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다는 점이다.
누구보다 김종인 능력 잘 아는 것은 文대통령
金 '100조 재원 대안'에 文 '70% 백만원' 대응
적벽의 대안에서 마주 보는 두 사람…승자는?
문 대통령에게 있어 김 위원장은 사실상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사람 중 한 명이다. 새정치민주연합 2015년 2·8 전당대회에서 당대표에 선출됐던 문 대통령은 이후 졸렬한 리더십을 보이며 그해 4·29 재·보궐선거와 10·28 재·보궐선거에서 연전연패를 면치 못했다.
4·29 재·보궐선거에서 '텃밭' 광주 서구을과 서울 관악을 등을 포함해 4석을 전부 내준 문 대통령은 "우리 당이 패배한 것일 뿐 국민이 패배한 게 아니다"라는 뜻밖의 말과 함께 당권을 고수했으나, 총선이 목전으로 다가온 연말에 즈음해 리더십의 한계는 분명해졌다. 새정치연합은 이 해 연말 마침내 분당되기에 이르렀으며, 당을 건사 못한 당대표가 총선을 치른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이 때 문재인 대표의 구원투수로 등판한 게 김종인 위원장이었다.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를 맡은 김종인 위원장은 국민적 이미지가 좋지 않은 친노(친노무현)·친문(친문재인) 패권 성향의 인사들을 과감히 공천배제하고, 개혁공천을 통해 민주당에 어울리지 않던 경제정당의 이미지까지 입히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중도 행보로 말미암아 2016년 총선에서 민주당은 제1당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이날 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비상경제회의를 주재하고 소득 하위 70% 이하의 1400만 가구를 대상으로 재난지원금 100만 원 지급을 결정한 것도 김종인 위원장의 출려에 따른 긴박한 맞대응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김종인 위원장이 전날 비상경제대책 기자회견을 통해 헌법 56~56조가 규정한 예산 재구성에 근거해 올해 예산 512조 원을 20% 절감해 100조 원 규모의 재원을 확보한다는 대범한 스케일의 대안을 내놓자, 이 방안이 국민들 사이에서 평가받기에 앞서 선행적인 조치를 단행했다는 해석이다.
과거 한 배에 탔던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마침내 적벽의 대안(對岸)에서 서로를 마주보게 됐다. 보름 후로 예정된 결전에서 어느 편의 선단이 불타며 적벽을 밝게 비출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김종인 위원장이 '바람'을 한 번 불러와보겠다는 의지는 굳건해보인다는 관측이다.
김종인 위원장은 이날 TV조선에 출연해 "어쩌다보니 지난 번에 민주당을 1당으로 만드는데 조력했다. 사실 그것으로 끝을 내고서 더 이상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으려는 생각으로 살았다"면서도 "문재인정권이 지난 3년 동안 정상적으로 국가운영을 했다면 '내가 나라를 이렇게 만드는데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할 게 없는데, 지난 3년을 보니 앞으로 남은 기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만든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만든 것이 정상적인 나라가 됐으면 모르겠으되, 이런 나라를 또 겪는다고 하면 국민들이 너무나 참 안타깝게 보인다"고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