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그래들이 본 '장그래법'…"계약기간 2년 연장? 에휴..."
입력 2014.12.31 08:52
수정 2014.12.31 08:58
정부 29일 발표한 '비정규직 종합대책안' 노동계·재계 반발 불러
정부가 29일 논란 속에 내놓은 ‘비정규직 종합대책안’이 노동계와 재계 모두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35세 이상의 기간제·파견(비정규직) 근로자의 계약 기간을 기존 2년에서 1~2년까지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대책안은 현재 최근 막을 내린 종편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 이름을 따 이른바 ‘장그래법’으로 불리고 있다.
굴지의 무역회사에서 계약 기간 2년의 비정규직 사원으로 일하며 우수한 실적을 쌓았지만, 결국 바라던 정규직 전환에 실패하고 회사를 떠나는 주인공 장그래의 모습을 담은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면서 비정규직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조명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정부는 3개월 이상 근무한 비정규직 근로자도 퇴직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고용기간이 연장된 뒤 정규직 전환이 안 될 경우 연장 기간에 받은 임금의 10%에 달하는 이직수당을 지급하는 방안을 이번 대책안에 포함했다.
또 기업의 ‘쪼개기 계약’을 방지하고자 기간제·파견 근로자에 대한 계약 갱신 횟수도 2년에 세 차례로 제한하는 내용도 담았다.
2년 근무 뒤 추가로 2년을 연장했을 때 부득이하게 해고할 수밖에 없다면 이직수당으로 보상하고, 비정규직 근로자의 정규직 전환을 피하기 위해 근로자와 2~6개월의 단기계약을 맺는 기업의 행태를 막기 위함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 같은 대책을 두고 ‘무분별한 장그래만 양산할 수 있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현행 기간제법 시행 사례에 비춰볼 때 기간제 근로기간 확대 방안 역시 기업의 정규직 회피 수단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근로자들 “일할 수 있는 기간만 늘어날 뿐 고용불안은 계속될 것”
유통업계에서 계약직 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A 씨(28)는 30일 ‘데일리안’과의 통화에서 “일할 수 있는 기간만 늘어난 것일 뿐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건 똑같지 않느냐”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지난 2월 현 직장과 1년의 고용 계약을 하고 현재 10개월째 다니고 있다는 그는 “연장을 하고싶다 해도 기업에서 추가로 일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그 전에 (기업에서) 계약을 종료해버리면 일자리를 잃는 건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2007년 제정된 기간제법이 ‘기간제 근로자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을 시정하고 근로조건과 권익 보호를 강화한다’는 당초의 입법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은 물론, 기업에서 일한지 2년이 넘은 근로자에 대해 반드시 정규직으로 고용하도록 강제하지 않고 있어 비정규직을 남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 일부 기업에서 2년이라는 제한된 기간 내 여러 차례 재계약을 하는 등 편법을 통해 비정규직 근로자를 활용하는 사례가 여러 차례 문제점으로 거론되는 한편, 2년 내 언제든 근로자를 해고할 수 있어 오히려 고용불안을 가중시키는 역효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지적도 끊임없이 제기된 바 있다.
A 씨는 “정부에서는 늘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없애겠다고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차별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며 “비정규직 대부분이 정규직 전환을 목표로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데 정부는 안정적인 직장을 원하는 비정규직들의 근본적인 고민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당장의 문제점만 해결하려는 모습인 것 같다”며 씁쓸해했다.
이밖에 보험업계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는 B 씨(31) 역시 본보와의 통화에서 “3개월 이상 근무하면 퇴직금을 주거나 이직수당 혜택을 주는 부분은 좋게 생각한다”면서도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규직 전환을 강제할 수 없어 비정규직 상황이 지금보다 크게 나아진다고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근로 기간 연장에 ‘35세 이상’이라는 나이 제한을 두는 것에 대해 “35세 이상이면 가정을 꾸려나가거나 육아에 한창이라 안정적인 직장에서 돈을 벌어야 할 나이인데 비정규직으로 일할 기간만 늘려주면 무슨 소용인가”라며 “단기간 일하고 말거라면 상관없지만 장기적으로 꾸준히 벌이를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실효성이 없는 대안”이라고 비판적인 입장을 밝혔다.
노동계 “땜질 처방”, 재계 “기업 사정 도외시” 거센 반발
이와 관련, 한국노총은 29일 성명을 통해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연장해 비정규직의 고용안정과 처우개선을 하겠다는 정부의 조삼모사식의 땜질 처방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어 “수차례 지적했듯이 비정규직 사용기간 2년 연장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의 시간을 2년 연장 할 뿐”이라며 “고작 몇 가지 내용들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는 것은 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파이프가 터져서 물이 흥건한데 터진 파이프는 그대로 둔 채 언제까지 물만 닦고 있을 것인가”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한국노총은 비정규직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상시 지속적 업무의 정규직 사용 △비정규직 사용사유 제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유도 등의 제도 개선이 우선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노동계의 반발에 더해 재계에서도 이번 정부가 내놓은 비정규직 종합대책안에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3개월 이상 근무 시 퇴직금을 지급하는 방안이나, 계약 갱신 횟수를 2년에 3회로 제한하는 등의 대책은 기업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특히 현 정부가 기업의 투자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규제를 혁파하겠다”고 나서고 있지만, 이번 대책안에서는 또 다시 고용과 관련한 세부 규정을 제시함으로써 오히려 기업에 대한 규제를 늘이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경영자총협회(이하 경총)는 29일 논평을 내고 “결과적으로 비정규직의 범위를 과도하게 넓히고 비정규직 고용에 대한 규제만을 강화하면서 사실상 고용의 주체인 기업의 사정과 노동시장의 현실은 도외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저성장기조로 많은 기업들이 위기에 봉착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대책이 현실화될 경우 기업이 인력운용에 대한 부담을 느껴 오히려 일자리가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경총은 “시장 상황을 반영한 합리적인 인력 운용이 가능한 토양을 만들지 않고서는 미래의 일자리 창출 자체를 기대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임을 인식하고 시장친화적인 대책 마련에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동부 “노사정위 각각 안 동등하게 놓고 협의할 것…세부 조항 변경도 가능”
한편, 향후 예정된 노사정위원회의에서 각각의 협의체가 상충되는 입장을 보이고 있어, 비정규직 종합대책 초안 논의 자체가 '불발'로 끝나버릴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에 대해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30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공개된 비정규직 종합대책안은 말그대로 초안이고 확정안이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노사정위의 논의에서 각각의 안을 동등하게 놓고 원만하게 협의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내년 3월까지 계획된 노사정위 논의를 통해 이번 정부 초안의 세부 내용이 변경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현 단계에서 협의가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는 섣부른 판단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 같은 노동부 측 입장은 앞서 29일 기자회견에서도 제시된 바 있다. 당시 권영순 고용부 노동정책실장은 “노사정위에 3월까지 결론을 내달라는 게 정부 입장”이라며 “앞으로 노사정이 실태조사를 해 연장을 바라지 않는 근로자가 많다면 숙고할 것이고 정부는 그에 따를 것”이라며 세부 규정의 변경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노사정위에서 원만한 협의를 이루지 못해 이번 공개된 정부안이 일방적으로 추진된다 하더라도 향후 국회의 문턱을 넘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