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 밀매 경유지’가 부른 비극…남태평양 피지, HIV 비상사태 선포
입력 2026.09.19 14:18
수정 2026.09.19 14:18
성인 60명 중 1명 HIV 감염…5년 새 16배 폭증
보건장관 "범정부 조직적 대응 착수"
지난해 보균 신생아 59명 중 18명 돌 전 사망
남태평양의 대표적 휴양 섬나라인 피지에서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자가 걷잡을 수 없이 급증하자 피지 정부가 국가 보건 비상사태를 공식 선포했다.
18~19일(현지시간) 외신에 따르면 피지 정부는 최근 공식 성명을 내고 HIV 확산에 맞서 범정부 차원의 대응을 펼치기 위한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이번 조치는 국경 봉쇄나 여행 금지가 아닌 보건의료 역량을 결집하기 위한 보건 비상사태다.
ⓒ뉴시스
피지 보건부에 따르면 지난해 피지의 신규 HIV 확진자는 2016명으로 전년 대비 27% 늘었으며, 2019년과 비교하면 불과 5년 만에 16배로 폭증했다. 전 세계적으로 HIV 신규 감염이 감소 추세를 보이는 것과 완전히 대조적인 흐름이다.
현재 전체 인구 약 92만명 중 성인 인구의 약 60명 중 1명(누적 약 9100명)이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 5년 전 ‘167명 중 1명’ 수준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가파른 상승세다. 특히 임산부 50명 중 1명(2%)이 감염 상태로 조사돼 모자 감염 문제가 심각하다. 지난해 태어나자마자 HIV 양성 판정을 받은 아기 59명 중 18명이 돌을 넘기지 못하고 숨졌으며, 최근에는 생후 2개월 된 영아가 결핵과 함께 HIV에 동시 감염된 사례가 보고되기도 했다.
UNAIDS은 급격한 확산의 주원인으로 ‘마약 밀매’와 ‘주사기 공동 사용’을 지목했다. 중남미와 아시아에서 생산된 필로폰(메스암페타민)과 코카인이 호주·뉴질랜드로 향하는 과정에서 피지가 중간 환적 기지로 이용됐고, 외국 범죄조직이 현지 운반책 등에게 현금 대신 마약으로 대가를 지급하면서 국내 마약 남용이 급증했다. 2019년 무렵부터 고위험 마약 투약자들이 주사기를 돌려 쓰거나 유흥업 종사자 집단과 얽히면서 바이러스가 급속도로 번진 것이다. 확인된 감염 경로의 절반 이상은 성적 접촉, 42% 이상은 정맥 주사 약물 투약인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의료 인프라와 인식은 열악한 실정이다. 감염자 중 자신의 감염 사실을 인지한 비율은 39%, 항레트로바이러스제 치료를 받는 비율은 22%에 그친다. 지난해 관련 사망자는 117명으로 2021년(25명) 대비 4배 이상 급증했다.
안토니오 랄라발라부 피지 보건장관은 “조직적이고 긴급한 대응이 절실하다”며 “사회적 낙인은 환자들이 병원을 찾는 것을 막는다. 감염자에 대한 비난을 멈춰 달라”고 호소했다. 피지 정부는 무료·비공개 검사 확대, 감염 전 예방 약물 요법(PrEP), 무료 치료 지원 등을 강화해 조기 발견과 확산 차단에 총력을 기울일 방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