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기행’ 김미조 감독 “용서 않고 끝까지 가는 사람의 얼굴이 궁금했죠”[인터뷰]
입력 2026.08.30 10:39
수정 2026.08.30 10:39
비극 속 일상의 웃음 담은 블랙코미디
‘갈매기’ 이후 첫 상업영화로 확장한 김미조의 세계
무덤 옆에는 빨래가 널려 있고, 그 곁으로 자동차가 지나간다. 김미조 감독이 2014년 가족과 함께 찾은 경주에서 발견한 것은 산 자와 죽은 자가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풍경이었다. 때마침 비가 내린 대릉원에서 파란 우비를 맞춰 입고 걸어가는 가족의 뒷모습을 보면서 ‘사람 하나 죽이고 내려오는 가족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습을 담아둔 한 장의 사진은 훗날 ‘경주기행’의 출발점이 됐다.
영화는 수학여행에서 막내딸 경주를 잃은 엄마 옥실(이정은 분)과 세 딸 장주(공효진 분), 영주(박소담 분), 동주(이연 분)가 8년의 기다림 끝에 살인범 백상현(변요한 분)을 납치해 경주로 향하는 여정을 그린다. 복수를 위해 같은 옷까지 맞춰 입은 가족은 한마음처럼 보이지만,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각자 감춰뒀던 상처와 생각을 드러낸다.
첫 장편 ‘갈매기’에서 시스템 안에서 목소리를 내는 인물을 바라봤던 김 감독은 첫 상업영화 ‘경주기행’에서 가족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면서 비극적인 사건 이후에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 다르게 품어온 상처, 그리고 반드시 용서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담았다.
김미조 감독ⓒ롯데엔터테인먼트
그렇게 출발한 이야기에 감독이 오랫동안 현실을 바라보며 품어온 질문들도 더해졌다. 특정 사건을 직접 재현하기보다 여러 비극을 목격한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던 의문이 작품의 바탕에 자리했다.
“저라는 사람이 이 이야기를 만들었기 때문에 제가 보고 겪어온 수많은 사건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고 생각해요. 세월호 참사도 그렇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나 이태원 참사 같은 사건들도 저에게 영향을 줬어요. 그런 사건을 볼 때마다 늘 궁금했던 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리고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였어요. 또 하나는 ‘그 이후에 남겨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였고요. 저는 그게 늘 궁금했어요.”
그 질문은 영화의 시선이 어디에 머물지를 결정했다. 범죄가 벌어진 이유나 가해자의 내면을 파고들기보다 사건 이후에도 삶을 이어가야 하는 가족에게 카메라를 돌렸다. 백상현의 과거와 범행 동기를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백상현에게 있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돌아오지 못한 딸과 그 딸을 그리워하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본질이니까요. 등장인물도 많아서 가족 한 명 한 명의 마음을 풀어내기에도 굉장히 바빴어요. 백상현에게 의도적으로 서사를 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기보다는 이 영화에는 그게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관객들도 크게 궁금해하지 않을 것 같았고요.”
가족을 바라보는 방식에서도 익숙한 전제를 비틀었다. 같은 상실을 경험했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슬퍼하거나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영화 초반 한데 뭉쳐 있던 이들은 경주로 향하는 동안 조금씩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처음에는 가족이 같은 옷을 입고 등장하잖아요. 남들이 봤을 때는 한마음 한뜻으로 복수하러 가는 집단처럼 보여요. 그런데 극이 진행될수록 각자 안에 있던 상처를 꺼내면서 가족이 붕괴되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어요. 여기서 붕괴는 나쁜 의미가 아니에요. 가족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 건 아니잖아요. 한 명 한 명 들여다보면 모두 다른 생각과 마음이 있어요. 집단으로 모였던 가족이 각자의 마음을 꺼내면서 개인으로 해체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가족을 좁은 차 안에 함께 태운 로드무비 형식은 이러한 변화를 끌어내는 장치가 됐다. 물리적으로는 가까이 붙어 있어야 하는 상황이 오히려 서로 감춰왔던 감정을 드러내게 만든다.
“‘경주기행’에 큰 영향을 준 작품이 두 편 있는데, 하나는 ‘미스 리틀 선샤인’이고 하나는 봉준호 감독님의 ‘괴물’이에요. 특히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 좋았던 건 가족이 좁은 봉고차 안에 갇혀 서로 꼴도 보기 싫은 모습까지 결국 직면하게 된다는 점이었어요. ‘경주기행’에도 그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자의든 타의든 가족이 작은 봉고차를 타고 다니면서 계속 부딪히고 말을 섞는 과정을 담고 싶었죠.”
복수라는 무거운 목적을 향해 가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비장함만을 유지하지 않는다. 가족끼리 이동하고 먹고 싸우는 일상이 끼어들면서 뜻밖의 웃음이 발생한다. 이는 장르를 먼저 정하고 계산한 결과라기보다 감독에게 익숙한 삶의 감각에서 비롯됐다.
“저희 아버지가 굉장히 유머러스하세요. 제가 아버지에게 받은 가장 큰 유산이 비극적인 일을 비극적으로만 보지 않는 태도인 것 같아요. 아무리 심각한 일이 있어도 그 안에서 어떻게든 좋은 점 하나라도 찾으려고 하는 가족이었어요. ‘경주기행’은 결국 김미조라는 사람이 쓴 이야기이고, 저는 ‘경주기행’이 곧 저라고 생각해요.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담길 수밖에 없었죠. 처음부터 ‘블랙코미디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김미조 감독ⓒ롯데엔터테인먼트
김 감독은 복수극에서 흔히 생략되는 시간에도 관심을 뒀다. 거대한 목표를 품은 인물들도 결국 먹고 자고 화장실에 가야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상황을 확장했다.
“복수를 하겠다는 건 알겠는데, 그 과정에서 이 사람들이 과연 복수만 생각할까 싶었어요. 배도 고플 거고 화장실도 가야 할 거고요.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함께 움직이는 것 자체가 굉장히 비효율적이잖아요. 당연히 그 안에서 싸움도 생길 것 같았고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블랙코미디가 얹히는 게 저에게는 자연스러웠어요.”
비극과 희극이 수시로 교차하는 만큼 이를 하나의 영화 안에서 어느 정도까지 밀고 당길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현장에서는 편집 이후의 전체 흐름을 예상하기 위해 같은 장면을 서로 다른 강도로 촬영했다.
“단편 때부터 블랙코미디나 드라마를 해왔지만 이렇게 장르적으로 확장한 건 처음이었거든요. 글을 쓰면서 상상했던 것과 실제 배우들의 연기가 만나면 또 결이 달라져요. 그래서 배우분들에게 여러 버전의 테이크를 부탁드렸어요. 조금 과한 버전, 현실적으로 낮춘 버전처럼 다양하게 찍었죠.”
그렇게 확보한 선택지를 두고 후반 작업에서는 보다 세밀한 조율이 이어졌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정서의 정도를 제작진끼리 공유하기 위해 수치까지 동원했다.
“후반 작업에서도 계속 조율했어요. 감정이라는 게 워낙 추상적이다 보니까 나중에는 ‘여기는 비극 70%, 희극 30%’라는 식으로 이야기할 정도였어요. 음악도 여러 버전을 만들었고, 편집에서도 장면을 자르고 다시 붙이면서 계속 균형을 맞췄어요.”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가족은 하나씩 복수의 여정에서 이탈한다.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은 옥실이다. 가족 모두가 같은 결론에 도달하도록 하지 않은 것은 시나리오 초고 단계부터 정해져 있던 방향이었다.
“처음부터 가족이 함께 무언가를 해낸다는 이야기보다는,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끝까지 해야만 해소될 수 있다고 믿는 한 사람이 결국 그것을 해내는 이야기에 방점이 있었어요. 초고 때부터 옥실의 단독 범행이라는 설정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어요.”
가족을 싣고 달리던 자동차의 역할도 그 지점에서 끝난다. 가족을 하나의 공간에 묶었던 차가 사라지고 나면 옥실은 비로소 홀로 백상현 앞에 선다.
“딸들은 각자의 마음을 털어놓으면서 하나씩 떨어져 나가고 결국 옥실 혼자 남아요. 마지막에는 그동안 가족을 둘러싸고 있던 자동차마저 부서지죠. 옥실이 백상현과 몸과 몸으로, 면대면으로 마주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옥실이 끝까지 붙잡고 있는 복수는 영화가 가장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감독은 그의 선택을 옳다고 선언하는 대신,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사회가 관습적으로 요구하는 태도부터 다시 들여다봤다.
“늘 궁금했어요. 우리는 ‘용서해야 한다’는 말을 하잖아요. 그런데 용서하면 정말 모든 게 해결되는 걸까. 반대로 용서하지 않으면 해결되는 걸까. 옥실처럼 너무 큰 상처를 받은 사람에게 ‘용서해야 한다’는 한마디가 과연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싶었어요. 무엇보다 용서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사람의 얼굴이 궁금했어요. 끝까지 가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해요.”
복수의 방법을 결정할 때도 극적인 볼거리보다는 옥실이 실제로 감당할 수 있는가를 먼저 따졌다. 결국 택한 교수형은 복수를 쉽고 통쾌한 행위로 소비하지 않도록 만드는 장치이기도 했다.
“옥실이라면 백상현을 어떤 방법으로 죽이려고 할까 고민했죠. 총은 현실성이 떨어지고 칼은 살과 살이 직접 맞닿아야 하는데 옥실이 과연 그걸 견딜 수 있을까 싶었어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복수를 해야 한다’가 아니에요. 복수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고, 그럼에도 이 사람은 끝까지 해야만 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산을 내려오는 옥실에게 쏟아지는 비 역시 이전까지 반복됐던 경주의 풍경과 다른 의미를 갖는다. 김미조 감독은 이를 모든 것이 해결됐다는 선언이 아니라 다음으로 움직이기 위한 작은 변화로 남겨뒀다.
“백상현을 죽이고 내려오는 길에 경주에 비가 내리잖아요. 그 비로 옥실의 가슴에 있던 불덩이를 조금이나마 꺼뜨려주고 싶었어요. 완전히 꺼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제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된 거죠.”
복수를 마친 뒤에는 밤이 지나고 해가 뜬다. 영화 내내 반복되던 낮과 밤의 규칙을 깨면서 옥실에게 찾아온 변화를 시간의 흐름으로 보여준다.
“영화에서 낮에는 여행하고 밤에는 범행이 이루어져요. 그런데 모든 일을 끝낸 옥실은 낮에 자수하러 가죠. 백상현을 죽이고 난 옥실에게 어떤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내일을 여는 첫 장면으로 일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옥실이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고 해서 그의 행동에 대한 판단까지 영화가 내려주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법정에서 판결 직전 화면이 닫히는 이유다.
“제가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에 페이드아웃했어요. 개인적인 희망으로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딸에게 가해졌던 법의 선처가 옥실에게도 조금은 내려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어요. 하지만 제가 그렇게 희망하는 것과 영화 안에서 결론을 내리는 건 다른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영화가 마지막까지 좇는 것은 누가 얼마만큼의 처벌을 받아야 하는지가 아니다. 사건이 끝났다고 해서 함께 끝나지 않는 사람들의 시간을 바라보는 데 무게를 둔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법적인 판결이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었어요. 비극적인 사건 때문에 누군가는 계속 울고 있고 상처 입은 가족들이 남아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어떻게 그 상처를 안고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게 제가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부분이에요.”
인물의 직업처럼 비교적 작은 설정에도 이러한 시선은 이어진다. 옥실을 미싱사로 설정하면서 감독은 가족이 놓여 있는 사회적 위치까지 함께 그려내려 했다.
“옥실이 미싱사라는 설정은 중요했어요. 저는 이 가족이 사회의 주류에서 조금씩 떠밀려온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미싱사 역시 산업이 발전하면서 조금씩 밀려난 직업군이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다큐멘터리 ‘미싱 타는 여자들’을 인상 깊게 본 것도 영향을 줬고요.”
미싱이라는 설정은 직업적 배경에 그치지 않고 영화의 이미지로 확장됐다. 다른 사람의 이름을 천 위에 남기는 옥실의 일은 타이틀 디자인에도 흔적을 남겼다.
“옥실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새겨주는 사람이잖아요. 경주의 이름도, 영주의 이름도 새겨줘요. 그 이미지가 중요했어요. 그래서 ‘경주기행’이라는 타이틀도 옥실의 자수처럼 보이도록 표현했어요.”
‘경주기행’은 김미조 감독이 상업영화의 제작 환경을 본격적으로 경험한 작품이기도 하다. 제한된 시간과 예산, 날씨라는 변수를 마주하면서 처음 계획했던 촬영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처음에는 한 컷 한 컷을 정말 세공하듯 찍고 싶었어요. 배우의 앞머리가 조금만 달라져도 다시 찍고, 카메라가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것도 신경 썼죠. 그런데 4회차 촬영을 마치고 현장 편집본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영화는 한 컷 한 컷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장면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거구나. 내가 큰 그림을 그리는 게 중요하지 모든 컷을 완벽하게 세공하는 게 중요한 건 아니겠구나 싶었어요. 그때부터 현장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졌어요.”
김 감독에게 영화는 그 시기에 자신이 품고 있는 질문을 따라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갈매기’에서 시스템에 맞서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개인을 바라봤다면, ‘경주기행’에서는 가족과 상실 이후의 삶으로 관심을 옮겼다. 그는 하나의 작품을 끝낸 뒤에는 그동안 붙잡고 있던 질문에서 벗어나 또 다른 궁금증을 향한다.
“작품을 하나 끝내고 나면 어느 정도 해소되는 느낌이 있어요. ‘갈매기’를 만들고 나서는 또 다른 게 궁금해졌고, 그래서 ‘경주기행’을 만들게 됐어요. 앞으로 제가 나이를 먹고 살아가면서 궁금한 것도 계속 달라질 것 같아요. 그때그때 제가 궁금한 이야기를 계속 해나가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