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황의 그늘 짙어진 삼성·SK...고객·노조·주주 '삼중 압박'
입력 2026.08.13 14:28
수정 2026.08.13 14:28
엔비디아, HBM 사양 낮춰 공급난·가격 부담 대응...애플은 中 CXMT 테스트
완제품 업계도 원가 압박...안에선 성과급·주주환원 놓고 갈등 확산
ⓒ연합뉴스
AI발 메모리 공급 부족과 가격 상승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호황이 새로운 대내외 부담을 만들어내고 있다. 밖에서는 가격 부담을 느낀 고객사들이 메모리 사양을 낮추거나 중국산으로 공급처를 넓히기 시작했고, 안에서는 늘어난 이익을 어떻게 나눌지를 둘러싼 노조와 주주의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13일 업계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차세대 AI 가속기 '루빈 울트라(Rubin Ultra)'에 당초 계획한 HBM4E 12단뿐 아니라 HBM4E 8단과 HBM4 12단·8단 등 상대적으로 사양이 낮은 제품을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지난해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HBM4E 12단을 루빈 울트라의 기본 사양으로 검토했으나, 3분기 들어 선택지를 낮은 사양까지 확대했다. 2027년에도 D램 공급 부족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데다 HBM4E 12단의 인증 일정과 수율 확보에 불확실성이 남아 있어서다.
여기에 HBM 조달 가격까지 오르면서 AI 칩 업체들이 저용량 제품을 선택할 유인이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AMD도 최근 2분기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에서 메모리 탑재량을 조정할 가능성을 열어뒀다.
다만 엔비디아의 이 같은 사양 하향 검토를 HBM 수요 둔화로 보기는 어렵다. 트렌드포스는 HBM 적층 단수를 낮출 경우 GPU당 메모리 용량은 줄어드는 대신 같은 공급 여건에서 더 많은 GPU를 출하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2027년 HBM 비트 출하량이 전년보다 50~60% 늘더라도 수요 증가를 따라가지 못할 것으로 전망했다
문제는 고부가 HBM과 서버용 메모리에 생산능력이 집중되는 사이 범용 D램 시장에서 공급 공백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틈은 중국 메모리 업체들이 글로벌 고객사를 확보할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애플은 아이폰과 맥북 등에 중국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의 D램을 탑재하는 방안을 놓고 제품을 테스트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HP와 에이서 역시 공급 부족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 외 지역에서 판매하는 일부 제품에 CXMT 메모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CXMT가 기술력이나 생산능력 측면에서 당장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지위를 위협하는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국내 메모리 업체들이 수익성이 높은 AI용 제품에 집중하는 동안 중국 업체가 PC와 스마트폰용 범용 D램에서 글로벌 고객사의 인증을 받고 납품 경험을 쌓는다는 점은 장기적으로는 부담이다.
중국 업체들의 추격은 범용 D램을 넘어 낸드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YMTC는 올해 2분기 글로벌 낸드 시장에서 출하량 기준 14%의 점유율을 기록하며 처음으로 3위를 차지했다. 아울러 고부가 서버용 eSSD까지 사업 영역을 확대하며 고부가 제품에서의 경쟁 심화도 예고하고 있다.
이외에 메모리 가격 상승은 완제품 업체에도 직접적인 원가 압박으로 돌아오고 있다. 메모리 가격이 오를수록 PC, 모바일, 가전 등의 제조원가도 함께 높아진다. 결국 고객사 입장에서는 제품 가격을 올리거나 메모리 용량을 조정하고, 기존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외에 다른 공급처를 찾을 유인이 커질 수밖에 없다. 애플과 PC 업체들의 CXMT 검토 역시 이런 공급난과 비용 부담의 연장선에 있다.
외부에서 고객사의 비용 절감과 공급처 다변화 움직임이 나타나는 가운데 내부에서는 호황의 과실을 둘러싼 갈등도 커지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성과급인 초과이익분배금(PS) 지급 방식을 놓고 노사가 대립하고 있다. 적자 발생 시 임금을 조정하는 방안 역시 쟁점으로 떠올랐다. SK하이닉스 통합노조는 삼성전자 초기업노조에 성과급 지급 방식 등을 놓고 자문과 협력을 요청했고, 양측은 주요 현안에 대해 공동 성명을 내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개별 기업에서 벌어졌던 성과 배분 갈등이 국내 반도체 업계 전반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삼성전자 역시 DS와 DX 간 성과급 격차를 둘러싼 내부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반도체 호황의 수혜를 받는 DS부문의 보상이 커진 반면 원가 부담과 실적 부진을 겪는 DX부문에서는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관련 노조의 세도 확대됐다.
성과 배분을 바라보는 주주의 시선도 곱지 않다. 대한민국주주운동본부는 영업이익과 연동한 성과급 지급이 주주 몫을 침해한다며 삼성전자 노사 합의에 반발해왔으며, 오는 21일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주주환원 확대 등을 요구하는 행동을 예고한 상태다.
업계 한 관계자는 "AI가 만든 메모리 슈퍼사이클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역대급 성장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고객과 임직원, 주주 사이에서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 숙제도 함께 던지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