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으로 간 연극, 삶이 된 무대…강화도 ‘없는극장’ [공간을 기억하다]
입력 2026.07.10 14:00
수정 2026.07.10 14:00
[다시, 소극장으로㊴] 인천 강화군 길상면 없는극장
문화의 축이 온라인으로 이동하면서 OTT로 영화와 드라마·공연까지 쉽게 접할 수 있고, 전자책 역시 이미 생활의 한 부분이 됐습니다. 디지털화의 편리함에 익숙해지는 사이 자연스럽게 오프라인 공간은 외면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공간이 갖는 고유한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올해 문화팀은 ‘작은’ 공연장과 영화관·서점을 중심으로 ‘공간의 기억’을 되새기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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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강화군 길상면, 이곳에는 이름부터 역설적인 극장이 하나 있다. 법적으로 등록된 문화예술 공연장이 단 한 곳도 존재하지 않는 강화도 땅에 기적처럼 터를 잡은 극단 앤드씨어터의 창작 기지, ‘없는극장’이다. 앤드씨어터 전윤환 연출가, 권근영 PD, 배우 민재원과 강윤민지, 조연출 조냇물까지 총 5명이 이 공간을 공동운영하고 있다.
극장 안으로 들어서면 일반적인 대학로의 어두운 블랙박스 극장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사방이 꽉 막힌 벽 대신 한쪽에는 푸른 산이, 다른 한쪽에는 일렁이는 바다가 내다보이는 거대한 통유리창이 눈을 사로잡는다. 세상과 단절되지 않고 자연을 고스란히 품은 공간이다.
고정된 객석도, 무대와 객석을 나누는 뚜렷한 경계도 없다. 암전 조명을 쓰기 위해서는 창고에서 검은색 시트지를 꺼내와 유리창에 일일이 붙여 빛을 막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앤드씨어터 멤버들은 오히려 이 “비어 있고 없는 상태”의 매력에 매료됐다.
“공간을 구할 때 여기 부동산 분께서 ‘1층인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라고 물어보셨어요. 서울 기준으로 생각하면 1층이 가장 비싸고 좋은 곳이잖아요. 그런데 웬걸, 강화도는 뷰 때문에 2층 카페가 훨씬 더 비싸더라고요. 1층에서는 바다가 덜 보이니까 괜찮겠냐는 걱정이었던 거죠. 하지만 저희는 오히려 ‘땡큐’였어요. 바다가 너무 잘 보였으면 관객분들이 공연 안 보고 창밖만 보셨을 테니까요(웃음).” (배우 강윤민지)
“오히려 지하가 아니라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 강화도에서 지하는 보통 ‘방공호’ 개념이라 시골 쪽은 지하층을 아예 건설을 안 하거든요. 서울에서도 해를 보면서 연습할 수 있는 중극장 규모의 공간이 정말 없는데, 예술가한테 이 공간이 주는 힘이 정말 큽니다.” (권근영 PD)
물리적인 구조뿐만 아니라 이 극장을 둘러싼 지리적 환경 또한 연극보다 더 연극적이다. 없는극장이 위치한 강화도는 기후위기로 인한 근미래 침수 예상 지역인 동시에, 수도권에서 유일한 인구 소멸 고위험 지역이다. 게다가 해안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고작 1.8km밖에 떨어지지 않아, 군사적 긴장감이 돌 때면 동네 전체가 예민해지는 접경지이기도 하다.
“이곳이 인구 소멸이든 기후든 전쟁이든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곳에서 ‘소멸의 담론’을 피워내는 장소로서 극장이 기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마을이 보이는 극장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무너진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연극을 실험해보고 싶었습니다.” (전윤환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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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중심의 서울을 떠나, ‘쉼’이 연극이 되는 섬으로
극단 앤드씨어터는 사실 대학로 연극계의 중심에 있던 팀이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대학로 소극장 ‘혜화동 1번지’의 6기 동인으로 활동하며 블랙리스트 사태, 미투 운동, 세월호 참사 등 시대의 굵직한 아픔들에 발 빠르게 목소리를 내왔다.
그러나 2018년 겨울, 동인 활동이 마무리에 접어들며 이들은 돌연 강화도로의 이주를 선택했다. 전윤환 연출가는 “서울의 창작 환경이 너무나 빠르고 오직 결과 중심적이었다”며 “다시 지역으로 내려가 온전히 작업에 집중하고, 결과물이 아닌 쉼을 통해 영감을 받는 작업을 동료들과 함께 해보고 싶었다”고 이주 배경을 밝혔다. 강윤민지 역시 “러닝을 하면서 발품을 팔아 이 건물을 발견했을 때의 설렘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덧붙였다.
처음에는 극장도 없이 주택의 방 한 칸을 동료 예술가들에게 무료로 내어주는 레지던시 ‘공간 그리고’를 불은면에서 시작했다. 이후 섬 전체를 거대한 극장 삼아 관객들과 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산책하는 ‘잠시섬 연극제’와 로컬 리서치 작업인 ‘강화도 평화 도큐먼트’를 8년 가까이 꾸준히 이어왔다.
그러다 작년 아르코(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주체 지원 사업에 선정되면서, 마침내 오랜 숙원이었던 물리적 거점 ‘없는극장’의 문을 열게 된 것이다. 건물 3층에는 국내외 창작자들이 일주일간 무료로 머물며 몰입할 수 있는 숙소(레지던시)를 만들고, 1층은 서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기둥 없고 해가 잘 드는 중극장 규모의 연습실 겸 극장’으로 탈바꿈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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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와 접경지, 삶의 현실이 연극이 될 때
앤드씨어터가 강화도라는 로컬에서 살아내며 마주한 삶의 현실은 고스란히 그들의 연극적 화두가 됐다. 코로나19 시절, 이들이 강화도 마당에서 작은 텃밭을 일구던 중 무려 54일간 해가 뜨지 않고 장대비가 쏟아진 적이 있었다. 온 동네의 작물이 썩어 문드러지고 극단의 공연마저 셧다운돼 온 마을이 장례식장처럼 가라앉았을 때, 이들은 기후위기가 책 속의 경고가 아닌 ‘나의 생존과 직결된 진짜 이야기’임을 온몸으로 감각했다.
전윤환 연출가는 이때의 감각을 바탕으로 국립극단, 아르코예술극장 등과 기후 프로젝트를 이어왔다. “미래 기후위기 시대에 극장이 가져야 할 진정한 역할은 ‘씨앗 창고’입니다. 근미래에 벚꽃나무나 감자 같은 자연의 오브제들이 소멸해 버렸을 때, 연극 속에서 이를 기억하고 재현해낼 수 있도록 그 씨앗과 전통을 보존하는 유일한 장소가 바로 극장이 되어야 합니다.”(전윤환 연출)
최전방 접경지역이라는 지리적 특성 역시 이들에게는 매 순간 생생한 연극적 무대다. 관객들과 버스를 타고 섬 곳곳을 이동하는 공연 도중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은 이들의 작업이 얼마나 현장성과 밀착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북한이 가장 잘 보이는 ‘연미정’에서 관객분들과 북한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군부대 안내 방송이 나와요. ‘북한 배경으로 사진 찍으시면 안 됩니다’라고요. 관객분들은 그것조차 연극 연출의 일부인 줄 아세요(웃음).” (강윤민지)
“진짜 아찔했던 적은 민간인 통제 구역 초소를 지날 때였어요. 저희 리허설인 줄 알았는데, 두 번째 초소에서 진짜 총을 멘 군인이 버스에 덜컥 타더니 휴대폰을 다 열어서 사진 찍은 걸 확인하겠다는 거예요. 저희는 정말 두려웠는데 관객분들은 ‘저 군인도 배우로 섭외한 거냐’며 감탄하시더라고요. 강화도 섬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극장이 되는 순간들이죠.” (전윤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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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인의 수평적 연대와 로컬 주민들이 지어 올린 극장
이 특별한 대안 공간은 전윤환 연출가, 권근영 PD, 배우 민재원과 강윤민지, 조연출 조냇물까지 총 5명의 공동 운영단이 철저히 수평적인 협의 체제로 이끌어간다. 극장 입구에 붙여진 ‘없는극장 이용 수칙과 지향점’ 문장 한 줄을 만들기 위해 몇 달간 밤샘 토론을 거쳤을 정도다.
자본이 부족한 시골 극장인 만큼 공간을 유지하는 물리적인 노동도 온전히 이들의 몫이다. 다른 동료 예술가들이 공연 후 폐기하려던 방염 커튼을 재활용해 극장 벽면에 설치하고, 시멘트를 깨고 덮은 목재 바닥은 철마다 다시 보호제를 덧바르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저는 배우이자 시설 관리를 맡고 있습니다. 마룻바닥 정기 관리 스케줄은 제가 잡지만, 결국 작업할 때는 멤버 다 같이 매달려서 해요. 손길은 참 많이 가지만 없어서 매력적인, 예술가들의 상상력으로 채워가는 공간이라 뿌듯합니다.” (배우 민재원) “극장을 만들면서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혼자였다면 중간에 포기했을 수많은 일들을, 5명이 역할을 나누고 시간과 노동을 쪼개어 버텼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권근영 PD)
이 외지인 연극쟁이들의 진심은 서서히 강화도 원주민들의 마음도 열어젖혔다. 서툰 텃밭 농사를 지을 때 슬며시 고구마 줄기를 쥐여주며 돌봐주던 동네 노인정 어르신들과 함께 주민 연극 ‘술 권하는 사회’를 올렸고, 올 5월에는 지역 내 원주민과 이주민 간의 실제 갈등을 다룬 연극 ‘통로’에 진짜 동네 이장님을 배우로 섭외해 무대에 세우는 유쾌한 실험을 성공시켰다. 주말 공연으로 인해 극장 주차장이 붐비면, 옆집 주민이 선뜻 자신의 넓은 마당을 관객 주차장으로 내어줄 만큼 이들은 지역 사회의 단단한 일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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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훌쩍 와서 쉴 수 있는 ‘만만한’ 공간이 되길”
인터뷰의 끝자락, 9년 차 강화도 주민이 된 이들에게 ‘없는극장’이 타인에게 어떤 공간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지 물었다. 이들이 꺼내놓은 핵심 단어는 의외로 거창한 예술적 수사가 아닌, 아주 소박하고도 따뜻한 ‘만만함’이었다.
“서울의 거대하고 빠른 속도에 지치고 힘들 때, 예술가들이 ‘야, 우리 그냥 강화도 없는극장 가서 며칠 자고 올까?’ 하고 훌쩍 떠나올 수 있는 만만한 숙소이자 연습실이었으면 좋겠어요. 연습은 핑계일 뿐이고, 와서 제철 밴댕이회 먹으며 숨을 고를 수 있는 그런 만만한 곳이요. 관객분들에게도 주말에 바람 쐬러 오다 슬쩍 들르는 만만한 극장이면 족합니다.” (전윤환)
동시에 이 극장은 미래 세대인 아이들과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들이 경계 없이 머무는 열린 플랫폼을 지향하고 있다. 극단의 대외 소통과 SNS 채널을 담당하는 조냇물 조연출은 공간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활력에 대해 언급했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오픈 스튜디오 워크숍을 통해 지역 주민들은 물론, 작년과 올해 수많은 어린이 관객을 만날 수 있어 큰 활력이 돼요. 아이들이 오면 격식 차릴 필요 없이, 그저 한 번 편안하게 잘 놀다 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극장이 되었으면 해요.” (조냇물 조연출) “어린이들이 처음 극장에 들어올 때는 엄청 낯을 가리다가도, 함께 인사를 나누고 연극에 참여하기 시작하면 나중엔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신나게 놀거든요. 아이들이 많이 찾아와줬으면 좋겠어요.” (배우 민재원)
“쉽게 허물고 새로 짓는 시대지만, 오래된 건물이 품은 정갈함과 세월의 멋스러움을 믿어요. 우리 극장도 이곳에서 사람들의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여, 오래되었을 때 비로소 뿜어내는 고유의 정취를 가진 공간으로 아주 오랫동안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강윤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