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가리면 퇴장, 누우면 1분 아웃’ 모르면 제2의 하석주 나온다
입력 2026.06.11 12:47
수정 2026.06.11 12:47
전후반 휴식 시간, 침대 축구 엄격 대처
입 가리고 말해도 즉시 레드카드 가능
FIFA는 이번 월드컵을 앞두고 대대적인 규정 변화를 발표했다. ⓒ AP=뉴시스
지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조별리그 멕시코와의 경기서 한국 축구는 사상 첫 선제골의 기쁨을 누렸다. 주인공은 하석주였다.
당시 하석주는 전반 27분, 프리킥을 통해 득점에 성공한 뒤 특유의 ‘비행기 세리머니’로 기쁨을 표현했다. 그토록 바라던 월드컵 첫 승에 대한 희망이 현실로 될 수 있다는 기대감도 함께 부풀었다.
그러나 그 희망은 3분 만에 악몽으로 바뀌었다. 전반 30분, 하석주는 멕시코의 라몬 라미레스를 저지하기 위해 뒤에서 슬라이딩 태클을 시도했다. 공을 겨냥한 태클이었지만 타이밍이 늦어 라미레스의 발목을 뒤에서 치는 형국이 됐다. 주심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레드카드를 꺼내 들었다.
국제축구연맹(FIFA)는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선수 생명을 위협하는 비신사적인 백태클(뒤에서 가하는 태클)에 대해 무관용 원칙을 적용하겠다. 옐로카드 없이 곧바로 퇴장을 명할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결국 하석주의 백태클은 본보기 판정의 사례가 됐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더 세밀하고 복잡한 바뀐 규정들을 선수들이 숙지해야 한다. FIFA는 2026 북중미 월드컵서 대대적인 규정 변화를 발표했다. 특히 잔니 인판티노 FIFA 회장은 축구의 고질적인 병폐인 ‘시간 지연(침대 축구)’과 ‘그라운드 내 언어폭력’을 뿌리 뽑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내비쳤다.
이번 규정 개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사실상 농구의 ‘쿼터제’와도 같은 시간 쪼개기다. FIFA는 북중미 대륙의 무더위를 고려해 ‘하이드레이션 브레이크(Hydration Break)’를 공식 의무화했다. 전반과 후반 각각 22분이 지난 시점에 심판의 주도하에 경기가 중단되며, 선수들에게는 정확히 3분간의 휴식 시간이 주어진다.
즉, 기존의 축구가 전반전 흐름을 잡으면 45분간 기세를 이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면, 이제는 22분 만에 흐름이 끊기고 상대의 맞춤형 대응 전략을 마주해야 한다. 감독의 실시간 지략 싸움과 용병술이 승패에 미치는 영향력이 이전보다 수배는 커졌다는 뜻이다. 체력적 한계에 부딪힌 팀에게는 단비가 되겠지만, 강한 압박과 템포로 상대를 몰아치던 팀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는 변수임에 틀림없다.
축구 팬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이른바 ‘침대 축구’와 노골적인 시간 끌기 행위는 이번 월드컵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출 것으로 보인다. FIFA가 들고나온 시간 규정은 가혹할 정도로 촘촘하고 구체적이다.
우선 이번 시즌부터 시범 도입됐던 ‘골키퍼 8초 룰’(골키퍼가 공을 잡은 뒤 8초 이내에 방출해야 하는 규칙)이 스로인과 코너킥 상황으로까지 확대 적용된다. 이제 선수가 스로인이나 코너킥, 혹은 골킥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시간을 끈다고 판단되면 심판은 즉시 손을 들어 ‘5초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
이 5초의 카운트다운이 끝날 때까지 플레이를 진행하지 않으면, 심판은 즉시 휘슬을 불고 공 소유권을 상대 팀에게 넘겨준다. 시간을 끌다가 슈팅 기회나 공격권을 통째로 헌납하는 대참사가 벌어질 수 있다.
1998년 하석주는 바뀐 룰을 숙지하지 못해 득점 후 3분 만에 퇴장 당했다. ⓒ 연합뉴스
선수 교체와 부상 상황에 대한 페널티 또한 엄격하다. 교체 아웃되는 선수는 전광판에 자신의 번호가 뜨는 순간부터 정확히 10초 이내에 그라운드 밖으로 벗어나야 한다. 이 10초 규정을 위반할 경우, 벤치에서 대기 중이던 교체 투입 선수는 곧바로 경기장에 들어오지 못하고 ‘1분간 출전 대기’ 징계를 받는다.
부상자 관리 규정도 마찬가지다. 선수가 통증을 호소하며 그라운드에 쓰러져 경기가 중단될 경우, 해당 선수는 의무대의 조치를 받은 후 반드시 경기장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최소 1분’ 동안은 주심의 허락이 있어도 경기장에 다시 들어올 수 없다.
여기에 VAR(비디오판독시스템)의 권한도 대폭 확대됐다. 기존의 득점, 페널티킥, 직퇴장, 선수 착오 상황에만 제한됐던 VAR이 이제는 코너킥 여부 판독, 그리고 경고 누적 퇴장 상황에서의 ‘두 번째 옐로카드’ 적절성 여부까지 잡아낸다. 사소한 반칙 하나, 심판의 눈을 속이려던 작은 몸짓 하나까지 비디오 화면에 잡혀 퇴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감시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번 개정안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입 가리기 금지 규정’이다. 경기 도중 상대 선수나 심판과 대치하거나 대화를 나눌 때, 유니폼이나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하는 행위가 적발되면 심판은 즉시 ‘직접 퇴장(Red Card)’을 명령할 수 있다.
인판티노 회장은 이번 규정 도입 배경에 대해 "그라운드 위에서 입을 가렸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음흉한 행동"이라며, "전 세계 수억 명의 팬들과 아이들이 지켜보는 월드컵에서 숨길 것이 없다면, 떳떳하게 말할 때 입을 가릴 이유가 전혀 없다. 아주 간단하고 명료한 논리"라고 설명했다.
골을 넣는 것만큼 중요한 게 바로 규정에 대한 이해다. 27년 전 한국 축구를 울린 하석주의 퇴장은 지금도 월드컵 참가 선수들, 무엇보다 태극 전사들에게 유효한 경고장으로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