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정권을 가로막아버린 선거관리 실패
입력 2026.06.08 09:00
수정 2026.06.08 17:21
22곳에서 투표 일시중단…사상 초유 사태
선관위 진상규명위는 스스로 조사하는 방식
李대통령 '셀프 면죄부'와 다르지 않은 구조
정치권, 국정조사 실시하고 특검도 빠르게
시민들이 4일 지방선거 및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투표용지 부족으로 투표 시간이 전날 오후 10시까지 연장됐던 서울 송파구 잠실7동 제2투표소 앞에서 항의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헌법 제24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진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제9회 6·3 지방선거 본투표일인 6월 3일, 대한민국 선거관리 체계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심각하게 훼손되는 일이 발생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이번 선거에서 서울의 송파·강남·서초·동작·광진·인천·부산·대구 등을 비롯한 총 50곳의 투표소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했고, 22곳에서는 투표가 일시 중단돼(송파구 최다) 밤늦게까지 유권자가 대기하는 등 국민의 참정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인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개인의 주권을 행사하러 투표소에 갔던 수십 수백 명의 시민들은 두 시간 이상 줄을 선 채 기다리거나, 현장 대응 미흡으로 투표를 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사후에는 대기 번호표를 받아 기다리게 하거나, 아파트 안내 방송 후 다시 투표소로 복귀하게 하는 등 현장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또한 투표용지 부족으로 유권자의 선거권 행사가 오랫동안 지연되어 본래 투표 종료 시간(18시)까지 완료되지 않아 공개적인 개표 중단 요구가 있었음에도 개표를 진행함으로써 유권자의 투표와 개표가 동시에 진행되는 상황도 발생했다. 이로 인해 국민의 참정권 행사에 끼친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며, 국민들 사이에서는 선거의 공정성과 절차적 정당성, 그리고 절차의 정당성을 바탕으로 확보되는 결과의 정당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고 대한민국 선거제도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사전투표율 23.51%를 기록했다. 이는 사전투표 제도가 전국 단위 선거에 처음 적용된 2014년 이후, 지방선거 기준 사전투표율 최고치를 기록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전체 투표율이 지난 지방선거투표율을 넘을 것이라는 예상이 충분히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낮은 투표율을 예상해 투표용지를 선거인수보다 적게 준비했고, 지역별 수요 예측이 빗나가면서 일부 투표소에서 용지가 부족해졌다"고 설명했다.
본디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와 국민의 참여로 실현되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에서 선거가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루어지도록 관리하고 감독하는 핵심 기관이자, 국민의 기본 권리인 참정권을 수호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헌법'의 보호를 받는다. 그러나 관내의 투표소별 선거인 수와 사전투표 결과 선거일의 투표 진행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하지 못해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자초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는 사태 직후,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정도의 설명을 하지 않고 다소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국민적 분노를 더욱 증폭시켰다.
국민들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선거의 공정성과 절차적 정당성, 그리고 결과에 대한 신뢰 문제를 제기했는데, 선관위는 사태 직후 대국민 사과문(사무총장 허철훈)에서 해당 사실을 인지한 후의 조치와 재발방지 대책만 언급할 뿐이었다.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총체적인 선거 부실 관리의 결과로써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의 유불리를 떠나, 대한민국 국민의 기본 권리 보장과 선거제도에 대한 사회적 신뢰에 관한 중대한 문제이다. 그런데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후속조치는 어떠한가.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책임을 통감한다며 자진사퇴했지만, 그는 올해 3월에 이미 임기가 종료됐던 사람으로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실질적 책임 조치로 받아들이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중앙선관위가 사태 재발 방지를 위해 구성한다는 진상규명위원회는 어떤가. 중앙선관위가 직접 전원 외부 전문가로 구성해 투표용지 부족 사태의 발생 원인과 대응 과정, 제도적 문제점 등을 전면 조사한다고 하는데, 과연 이치에 맞는 일일까? 이는 이해충돌 가능성이 있는 기관이 '스스로를 조사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최근 공소취소 특검법 논란에서 제기된 '이재명 대통령 셀프 면죄부'와 유사한 구조를 갖는다.
그러므로 정치권은 우선적으로 국정조사를 실시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특검도 빠르게 실시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 파악된 투표용지 부족 사태의 발생 경위와 의사결정 과정, 당일 현장 대응 과정의 문제점을 국민 앞에 명명백백 공개해야 한다.
또한 재발 방지를 위한 전반적인 선거 관리 체계 개혁뿐만 아니라, 선관위의 고질적 문제도 함께 점검해야 한다. 그간 논란이 됐던 위원회의 겸직 및 비상근 운영, 선거 기간 휴가 사용, 가족채용비리, 선거법에는 별도 규정이 없어도 내부 판단에 따라 지침을 손질할 수 있었던—이번 지방선거부터 투표용지 최소 50% 인쇄 지침—과도한 내부 재량권 행사 문제 등을 전격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선관위 대수술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무너진 신뢰는 회복 불능의 상태로 빠지게 된다.
참정권은 민주주의의 출발점이자 국민 주권을 실현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소중한 권리이다. 어떠한 이유로도 국민의 소중한 한 표를 가로막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이번 사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무너진 신뢰는 사과만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 있는 개혁만이 국민이 선거제도를 다시 신뢰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
ⓒ
글/ 송서율 연세대 대학원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