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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년의 시차 지운, 이서진·고아성의 ‘바냐 삼촌’ [D:헬로스테이지]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6.05.21 01:16
수정 2026.05.21 01:16

5월 31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LG시그니처홀

차갑고 높은 무채색의 벽이 무대를 압도한다. 대극장의 높은 층고를 가득 채운 거대한 수직의 공간은, 인물들이 갇혀 지대는 러시아의 시골 영지를 상징하는 동시에, 그들이 끝내 벗어나지 못하는 삶의 권태와 폐쇄성을 시각화한다. 그리고 그 안에는 커다란 식탁과 몇 개의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LG아트센터

지난 7일 LG아트센터에서 개막한 연극 ‘바냐 삼촌’은 텅 빈 무채색의 공간 위에서 인간의 후회와 환멸을 투명하게 응시한다. 손상규 연출은 130년 전 러시아 대문호 안톤 체호프의 고전을 현대의 감각으로 재구성해, 화려한 미사여구 대신 인물의 긴장감 있는 호흡과 정적으로만 145분을 채운다.


작품의 줄거리는 원작의 틀을 충실히 따른다. 극은 러시아의 시골 영지에서 평생 매형인 세레브랴코프 교수를 위해 헌신한 바냐와 그의 조카 소냐의 일상을 다룬다. 퇴직 후 젊은 아내 엘레나와 함께 돌아온 교수로 인해 이들의 일상에도 균열이 생긴다. 손상규 연출은 이들의 엇갈린 관계를 ‘보여주는 연극’이 아닌, ‘실재하는 삶’으로 접근해 무대에 올려놓는다. 극단 양손프로젝트에서 보여준 미니멀리즘을 대극장으로 확장하며, 무대 위 여백을 인물들의 심리적 거리감으로 바꿔놓는다.


손 연출은 원작이 지닌 시대적 배경을 오늘의 언어와 감각으로 옮겨오며, 타인의 인생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태도를 핵심으로 삼았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남의 인생을 쉽게 말하고 재단하는 현대 사회의 정서 속에서, 우당탕거리며 실수하고 후회하는 바냐의 인생을 향해 “잘못한 게 아니다, 이대로도 괜찮다”는 담백한 위로를 건네는 식이다.


ⓒLG아트센터

이러한 연출적 의도는 27년 만에 무대에 선 이서진의 연기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그는 기존 연극의 정형화된 발성법을 버리고 본인 특유의 무심하고 건조한 말투로 대사를 처리한다. 삶에 대한 냉소와 가족에 대한 애정이 뒤섞인 이서진의 바냐는 비극 속 주인공이라기보다 일상에 매몰된 지친 중년의 얼굴에 가깝다. 억지로 힘을 주지 않는 그의 생활 연기는 인물의 아이러니를 부각하며 객석에서 의외의 웃음을 끌어내기도 한다. 바냐에 대해 가진 기존의 인상과 완전히 다른 해석을 보여준 이서진은 평범한 중년 남성의 피로감을 선택함으로써 고전의 인물을 우리 곁으로 끌어내렸다.


고아성 역시 단단한 연기로 무대의 균형을 잡는다. 첫 연극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너지는 현실 속에서 삶을 묵묵히 감내하는 조카 소냐를 섬세하게 표현한다. 초반의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서 시작해 점차 인물의 감정을 또렷하게 쌓아 올리는 과정은 관객이 인물의 고통에 밀착하게 만든다. 특히 극 후반부, 바냐를 위로하며 담담하게 읊조리는 마지막 독백은 과장된 슬픔 없이도 삶을 묵묵히 살아내겠다는 의지를 전달하면서 깊은 여운을 남긴다.


ⓒLG아트센터

‘바냐 삼촌’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창한 카타르시스나, 압도적인 반전을 지향하지 않는다. 교수 부부가 떠난 자리에서 바냐와 소냐가 다시 일상의 장부를 정리하며 남겨진 시간을 맞이하는 모습은 이 공연이 지향하는 현실적인 위로를 대변한다. 작품은 삶이 비록 환멸의 연속일지라도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살아내야 하는 이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 공연은 5월 31일까지 LG아트센터서울 LG시그니처홀.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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