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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이 투자금으로"… 해외 영화 선진국들의 '공격적 자본 설계' [한국 영화, 돈이 마른다➂]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6.05.17 01:18
수정 2026.05.17 01:18

프랑스·영국·벨기에가 만든 ‘영화 자본 순환 구조’

한국 영화계가 최근 ‘대형 전략 펀드’와 세액공제 확대를 요구하고 나선 배경에는 이미 해외에서 작동 중인 영화산업 투자 모델들이 있다. 영화인연대가 내놓은 해법 역시 단순한 아이디어 차원이 아니라 프랑스·영국·벨기에 등 실제 사례를 참고한 구조다. 핵심은 공통적이다. 정부가 직접 재정을 투입하되 민간 자본이 영화시장 안으로 흘러들어올 수 있도록 세제 혜택과 투자 구조를 함께 설계했다는 점이다.


해당 이미지는 AI로 제작됨ⓒ

프랑스 영화 지원의 핵심 기관은 CNC(국립영화영상센터)다. 1946년 설립된 문화부 산하 기관으로, 한국의 영화진흥위원회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을 합친 역할을 담당한다.


CNC의 특징은 재원 구조다. 극장 입장권 세금, TV 방송서비스세, VOD·온라인 유통세를 자동으로 거둬들여 연간 약 8억 유로(약 1조1400억원) 규모의 기금을 운용한다. 넷플릭스 등 온라인 플랫폼과 영상 유통 시장에서 발생한 수익 일부가 다시 영화산업 재원으로 들어가는 구조다. 흥행 수익의 일부가 자동으로 다음 영화 제작 재원으로 환류되면서 정부가 별도 예산을 편성하지 않아도 산업 스스로 재원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이 구축돼 있다.


제작사 지원은 CIC 제도를 통해 이뤄진다. 국내에서 사용된 핵심 제작비(배우·스태프 인건비, 촬영비, VFX·후반작업비 등)의 30%를 환급형 세액공제로 돌려준다. 편당 한도는 3000만 유로(약 520억원)이며, 최대 170억원 이상을 현금처럼 돌려받을 수 있다. 법인세를 낼 이익이 없어도 환급이 가능하다는 점이 핵심이다.


반면 한국은 현행 조세특례제한법 제26조에 따라 대기업 3%, 중소기업 10% 수준의 비환급형 세액공제만 허용하고 있다. 세액공제는 실제 납부할 법인세가 있어야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구조라 적자 상태인 제작사에는 사실상 실효성이 낮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승범 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 대표는 “비환급형 세액공제를 시행하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거의 유일하다”고 말했다.


ⓒ해당 이미지는 AI로 제작됨


민간 투자 측에서는 소피카(SOFICA) 제도가 작동한다. 1985년 법으로 설립된 소피카는 개인이나 법인이 영화·영상 전용 펀드에 투자하면 투자금의 최대 48%를 세액공제해주는 제도다. 개인당 투자 한도는 가구 소득의 25% 또는 1만 8000유로(약 3000만원) 중 낮은 금액이며 최소 5년 보유 의무가 있다. 2025년 기준 13개 소피카가 승인돼 총 7300만 유로(약 1250억원) 규모로 운영 중이며, CNC 승인 영화의 절반 이상에 소피카 자금이 투입되고 있다. 정부가 재원을 공급하고 세제 혜택으로 민간 자본 참여를 유도하면서 영화산업 내부에서 자금이 순환하는 구조를 만든 셈이다.


영국은 2024년 1월 기존 영화·TV 세액공제를 통합·개편한 AVEC(Audio-Visual Expenditure Credit) 제도를 도입했다. 영국 내에서 사용된 핵심 제작비의 최대 80%를 대상으로 하며, 장르와 유형에 따라 환급률을 차등 적용한다. 실사·UHD 드라마는 25.5%, 애니메이션·어린이 프로그램은 29.25%, 독립영화는 39.75%까지 현금 환급이 가능하다. 외국 제작사와 자국 제작사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영국이 이 제도로 달성한 것은 자국 영화 보호만이 아니다. 할리우드 대형 스튜디오들이 영국을 촬영지로 선택하게 만드는 강력한 외자 유치 수단이 됐다. 세액공제가 산업 보호와 투자 유치를 동시에 해결하는 것이다.


BFI(영국영화협회)는 1933년 설립됐으며 복권기금(National Lottery Fund)을 운용해 영화 제작·배급·교육을 지원한다. 정부 보조금, 복권 수익, 세액공제의 삼중 재원 구조는 특정 재원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안정성을 높인다.


벨기에는 더 공격적이다. 2003년 도입한 택스 쉘터(Tax Shelter) 제도는 법인 투자자에게 투자금의 421%를 해당 연도 과세 소득에서 공제해준다. 1억원을 투자하면 4억 2100만원을 비용으로 인정해 과세 소득에서 빼주는 것이다. 법인세율 25% 기준으로 계산하면 세금 절감액이 투자금의 105%에 달한다. 투자하는 순간 원금이 회수되는 구조다.


단, 공제 대상 금액은 영업이익의 50% 또는 연간 100만 유로 중 낮은 금액으로 제한돼 있다. 무제한 혜택이 아닌, 설계된 범위 안에서 작동한다.


이 제도는 프랑스·독일 등 주변국 제작 물량까지 벨기에로 끌어오는 효과를 냈다. 실제 벨기에는 현재 유럽 내 대표적인 공동제작 허브 국가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캐나다는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협업하는 구조다. 캐나다 내 제작사가 만드는 영화·드라마·애니메이션·다큐멘터리에 대해 연방정부가 인건비의 25%를 환급하고, 각 주정부가 20~30%를 추가 환급한다. 인건비만으로 최대 50%가 돌아온다.


독일 FFA(연방영화협회)는 흥행 수익에 비례해 자동으로 지원금을 배분하는 구조에 지역 투자 인센티브를 결합했다. 공영방송의 의무 공동투자 제도도 병행한다.


호주 스크린 오스트레일리아는 민간 스튜디오와의 매칭 공동투자 시스템을 운영한다. 빌리지 로드쇼 등 민간 파트너와 정부가 공동 출자해 리스크를 나누는 방식이다. 슬레이트 파이낸싱, 즉 단편 프로젝트 단위가 아닌 복수 영화를 묶어 투자하는 구조가 핵심이다.


해외 모델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원리는 비교적 명확하다. 정부가 재원을 공급하되 투자 의사결정 과정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세제 혜택을 통해 민간 자본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며, 플랫폼·유통 매출 일부를 다시 산업 재원으로 환류시키는 구조다. 프랑스 CNC나 영국 BFI 역시 단순 보조금 체계가 아니라 산업 내부에서 자금이 순환하도록 설계돼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반면 한국은 정부 출자 중심 구조에 의존하고 있을 뿐, 민간 투자 유인과 재원 환류 시스템은 사실상 부재한 상태라는 지적이 나온다.


영화계는 한국 역시 단순히 모태펀드 출자 규모만 늘리는 방식에서 벗어나 투자 구조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보고 있다. 우선 대형 전략 펀드를 통해 제작 편수를 회복할 수 있는 규모의 자금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동시에 일반 기업과 금융권 자금이 영화시장에 들어올 수 있도록 세액공제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영화인연대와 영화계는 OTT·온라인 플랫폼 매출 일부를 영화발전기금 재원으로 환류시키는 구조까지 마련돼야 산업이 장기적으로 자생력을 가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영화계는 현재처럼 정부와 일부 대기업 중심으로 투자 판단이 이뤄지는 구조에서 벗어나, 제작·투자·배급 현장을 이해하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이 투자 의사결정 과정에 폭넓게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물론 이를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세액공제 확대만 해도 기획재정부와의 조세 정책 협의가 선행돼야 하고, OTT 플랫폼 부과금 역시 업계 반발 가능성이 크다. 정부 재정이 투입되는 만큼 대기업 특혜 논란과 투자 심사 공정성 문제 역시 함께 풀어야 할 과제로 꼽힌다.


영화계는 결국 핵심이 돈을 더 푸는 것이 아니라 자금이 다양한 곳으로 흘러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데 있다고 본다. 프랑스의 소피카처럼 개인 투자자에게 세액공제 혜택을 제공하면 중저예산 영화와 신인 감독 프로젝트에도 새로운 투자 재원이 유입될 수 있고, 일반 기업 자금 역시 한시적 조세 감면을 통해 영화시장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기대다.


영화계는 현재 투자금이 일부 글로벌 OTT와 대기업 배급사 중심으로 집중되면서 산업 다양성이 빠르게 약화되고 있다고 본다. 업계 관계자는 “조세 감면과 세액공제는 단순한 지원 정책이 아니라 한국 영화와 드라마 산업을 다시 순환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구조 개편 논의”라며 “지금은 산업 전체의 자금 조달 구조를 다시 설계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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