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죽지 않을 만큼만 다쳤으면"…출근이 두려운 간호사들
입력 2026.05.12 13:55
수정 2026.05.12 14:02
보건의료노조, 12일 국회서 기자회견
“욕설 듣고 맞고 물려도 다시 출근”
식사 거름률 65.5%·폭언 경험률 62.3%
보건의료노조 “간호사 인력기준 법제화해야”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국제 간호사의 날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2026년 보건의료노동자 정기 실태조사'를 발표했다. ⓒ데일리안 김효경 기자
“저는 어린 시절부터 간호사를 꿈꿨고, 지금도 이 직업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병원을 떠날 수밖에 없게 만드시나요.”
사립대병원에서 10년째 근무 중인 A간호사는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국제 간호사의 날 기자회견’에서 “간호사들의 희생과 사명감만으로 유지되는 시스템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요즘 제 동료들은 출근길에 ‘딱 죽지 않을 만큼만 교통사고가 났으면 좋겠다. 그러면 쉴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을 한다”며 “섬망 환자에게 욕설을 듣고 맞고 꼬집히고 물리는 것보다 더 무서운 건 내일 또 이 현장으로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이 같은 현실은 실제 조사 결과로도 확인됐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보건의료노조)이 이날 발표한 ‘2026년 보건의료노동자 정기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간호사의 72.1%는 “3개월 내 이직을 고려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이는 전체 보건의료노동자 이직 고려율(64.6%)보다 7.5%p 높은 수준이다.
현 직장 근속 기간별로는 3~5년차 간호사의 이직 고려율이 79.9%로 가장 높았다. 이어 ▲6~10년차 75.5% ▲11~15년차 68.1% ▲1~2년차 64.5% ▲16~20년차 63.5% ▲21년차 이상 53.8% 순으로 나타났다. 특히 현 직장 3~5년차이면서 3교대 근무를 하는 간호사의 이직 고려율은 81.4%에 달했다.
간호사들이 이직을 고려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근무조건(48.9%)이었다. 이어 임금 25.2%, 직장문화 6.5%, 육아 5.2%, 건강 4.8% 등이 뒤를 이었다. 반면 간호 업무 자체 때문이라는 응답은 1.5%에 그쳤다. 간호사들이 업무 자체보다 인력 부족과 업무 강도, 교대근무 등 열악한 노동환경에 더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의미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국제 간호사의 날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2026년 보건의료노동자 정기 실태조사'를 발표했다. ⓒ데일리안 김효경 기자
인력난에 대한 호소도 컸다. 직장생활 만족도 조사에서는 인력수준 불만족 응답이 72.2%로 가장 높았고, 업무량·노동강도 60.7%, 임금 58.4% 순으로 나타났다. 간호사의 70.3%는 현재 근무 부서의 인력이 부족하다고 답했다.
아울러 최근 1년간 업무 관련 폭언을 경험했다고 답한 간호사는 62.3%로, 전체 보건의료노동자 평균(54.3%)보다 8.0%p 높았다. 부서별로는 응급실이 74.0%로 가장 높았고, 간호간병통합병동 71.4%, 내과병동 68.6%, 외과병동 67.6% 순이었다.
송금희 보건의료노조 수석부위원장은 취지 발언에서 “이 같은 결과는 개인의 이직 문제가 아니라 병원이 숙련 간호사를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라며 “환자 곁에서 경험을 쌓은 간호사들이 무너지고 있고, 그 빈자리는 다시 신규 간호사와 남은 간호사들의 부담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간호사들은 간호가 싫어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병원 노동환경이 간호사들을 병원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며 “간호사 인력기준을 법제화해 숙련 간호사가 병원을 떠나지 않고 환자 곁을 지킬 수 있도록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국제 간호사의 날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2026년 보건의료노동자 정기 실태조사'를 발표했다. ⓒ데일리안 김효경 기자
의정 갈등 이후 병원 내 진료지원(PA) 인력 비중이 늘어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보호장치는 미흡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수도권 대학병원에서 근무 중인 26년차 B간호사는 현장 발언을 통해 “그동안 인력이 부족하다고 수만 번 외쳐도 침묵하던 병원과 정부는 의정 사태로 병원 수익과 환자 건강이 위협받자 그제서야 보호해주겠다며 움직였다”며 “병원은 숙련된 간호사들을 PA간호사로 뽑아갔고, 전공의가 이탈해도 병원이 돌아가도록 우리를 ‘상시 대기 인력’으로 고착화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전담간호사 제도화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병원과 정부에 강력히 요구한다”며 “PA간호사의 인력 기준을 즉각 마련하고 노동환경과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 또 명확한 업무 분담을 통해 미루기식 갈등을 해소하고 안전한 노동환경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건의료노조는 이번 조사 결과가 간호사 이직 문제가 단순한 임금 문제가 아닌, 인력 부족을 중심으로 한 복합적인 문제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특히 3교대 근무와 인력 부족이 겹칠 경우 이직 고려율이 크게 높아지는 만큼, 부서별·근무형태별 특성을 반영한 간호인력 기준 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보건의료노조는 “대한민국에는 아직도 간호사 1명이 담당해야 하는 적정 환자 수 기준이 없다”며 “병원은 인건비 부담을 이유로 간호사 인력을 최소화하고 있고, 그 결과는 간호사 이직과 환자 안전사고로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간호사 인력 기준은 환자 생명을 지키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라며 “간호사 배치 기준인 ‘간호사 대 환자수 비율’(Ratio) 제도화를 강력히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보건의료노조는 올해 핵심 투쟁 과제로 ‘보건의료 인력기준 제도화’와 ‘모든 보건의료노동자 노동기본권 보장’을 확정하고 범국민 서명운동에 나서고 있다. 오는 13일 산별중앙교섭 상견례를 시작으로 원청 대상 집단교섭과 사업장별 산별 현장교섭을 진행하며, 교섭이 원만하게 이뤄지지 않을 경우 7월 7일 산별 집단 쟁의조정신청에 돌입한다는 방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