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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배우발견⑪] 악조건 속 외로운 싸움, ‘전사’ 신현빈(너를 닮은 사람)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입력 2021.11.13 14:04
수정 2021.11.13 16:34

배우 신현빈 ⓒ이하 출처=드라마 '너를 닮은 사람' 홈페이지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감독 김용훈, 2020년 개봉)에서 배우 전도연(연희 역)과 쌍벽을 이루는 여성 캐릭터 미란을 연기해낸 그이기에,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잘 씻지도 않고 급하면 맨발로 뛰는 외과 레지던트 장겨울로 깊은 인상을 남긴 그이기에 드라마 ‘너를 닮은 사람’에 캐스팅했을 것이다.


뿜어내는 에너지 파장이 큰 배우 고현정(정희주 분)과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해야 하는 기본,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 앞에서는 주저함이 없는 정희주를 쥐락펴락하는 구해원 역에 배우 다른 누가 가능했을까 상상하기 어렵다. 배우 신현빈 얘기다.


신현빈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에서 대한민국 최고라 불리는 전도연과 나란히 있어도 밀려 보이지 않는 기를 보여주었고,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는 주변 인물과 섞이지 않아도 자신의 서사를 만들어갈 줄 아는 아우라를 확인시켰다. 고현정과 대립각을 세울 수 있는 당찬 연기자, 아무도 응원하지 않는 사랑하기 힘든 캐릭터임에도 꿋꿋이 자신의 전쟁을 치러나가는 구해원, 배우 신현빈이 제격이다.


잘한 캐스팅이라고 첫 회부터 무릎을 쳤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놀랐다. 이 정도로 악조건 속에서 외로운 싸움을 해야 하는 캐릭터일 것이라고 짐작하지 못했던 것, 또 예상을 벗어날 만큼 악마가 된 인물을 흔들림 없이 연기하는 신현빈이 가져다준 놀라움이었다.


'미미'(미친 미술)로 불리는 미술교사 구해원 ⓒ

악조건부터 얘기해 볼까. 과거 드라마 ‘청춘의 덫’(1999)을 생각해 보자. 당시 우리는 심은하가 연기한 서윤희를 응원했고, 그의 복수를 한마음으로 응원했다. 연인 강동우(이종원 분)에게 어떠한 헌신을 했는지, 어떻게 처절히 버림받았는지 우리에게 다 보여주고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는 악인을 비난하고 선인을 지지하는 마음으로 서윤희를 응원했다.


하지만 ‘너를 닮은 사람’에서 구해원은 학생 뺨 때리는 기간제 교사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첫선을 보였다. 잘못을 하고도 제대로 된 반성과 사과는커녕 자기감정에 휩싸여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 줄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끈질기게 상대를 괴롭히는 스토커의 모습을 이어갔다.


우리는 추측만 했다. 자신의 화풍과 연인을 빼앗겼구나, 정희주에게. 오뉴월에도 서리를 내리는 여인의 한이구나. 그렇게 이해 좀 하려 하면 선을 또 넘었다. 맥락 없이 정희주에게 봉변을 날리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학생과 학부모를 이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미성년임에도 희주의 딸이라는 이유로 안리사(김수안 분)의 마음에 상처를 내는 어른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


어떤 결혼식 풍경, "나는 나의 불행을 전시하고 싶었다" ⓒ

뿐인가. 빼앗겼던 연인 서우재(김재영 분)를, 기억을 잃어 영문을 모르는 과거 남자친구를 제 곁에 데려다 놓고 본인 표현을 빌리면 결혼이라는 이름의 수갑으로 묶었다. 수갑을 차고도 달아날까 위치추적기를 달았고 자는 새 달아날까 봐 수면제를 먹여 재운다. 믿었던 두 사람 정희주와 서우재의 도리를 벗어난 불륜에 범죄와 같은 행동으로 맞섰다.


서윤희가 복수의 강도를 높일수록 ‘이제 제자리를 찾는’ 쾌감을 느꼈던 우리였다 해도 구해원의 복수극에 동조하기 어렵다. 되레 서우재의 막히는 숨통에 공감이 가고, 과거 뻔뻔한 행적을 상세히 지켜본 적 없는 정희주의 현재 고통이 보인다. 구해원은 흡사 상대의 고통을 즐기는 가학적 사이코패스의 모습이고, 자신의 분노를 근거로 거리낌 없이 타인을 해하는 조커처럼 보인다.


보는 이의 숨통을 조이는 것 같은 신현빈의 신들린 연기에 시청자의 응원을 받기 힘든 구해원, 그럼 드라마 안에서는 응원받고 사랑받고 있는가. 그렇기라도 한다면 구해원의 싸움은 덜 외로울 텐데 그것도 신통치 않다. 할아버지와 엄마의 사랑을 받지만 혈육의 사랑이고, 주영이(신혜지 분)가 믿고 의지하지만 제자를 이용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그들의 사랑과 존경은 시청자에게로 전이되기 어렵다.


흔들림 없이 구해원의 선택을 연기한 배우 신현빈 ⓒ

배우 신현빈에게 주어진 악조건이 내러티브에만 있는 게 아니다. 매회가 아니라 장면마다 바뀌는 화려한 패션으로 등장하는 고현정과 달리 9회까지 초록 코트 하나로, 거의 단벌로 등장했다. 의상과 메이크업도 배우에게는 표현 수단의 하나인데 같은 옷, 같은 헤어스타일로 신현빈은 요동치는 구해원의 감정을 연기했다.


그리고 정희주가 사준 초록 코트를 불에 태우며 구해원은 지금까지의 질주로도 모자란 듯 더욱 강력한 악한이 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복수를 위해 악마와 영혼을 바꾼 듯한 모습이 10회부터 그려지기 시작했다. 색이 없다고 느껴지는 오트밀색 코트와 니트와 바지, 그 차림으로 악행의 강도를 어떻게 높여갈지 벌써부터 간담이 서늘하다.


배우가 어떤 캐릭터를 연기할 때 ‘누가 해도 이보다 잘할 수는 없었다’는 극찬을 듣는다면 보람찰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배우는 관객과 시청자에게 사랑받고 아낌을 받길 원한다, 그것이 악역일지라도. 특히나 드라마의 경우, 시청자의 응원 속에 연기하면 더욱 힘이 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배우 신현빈은 서사로든 외적 스타일이든 응원이든 자신에게 유리한 지점이 없는 ‘악조건’ 속에서 외로운 전쟁을 하고 있다. 그런데 너무 잘하고 있다. 너무 잘해서 사랑할 수 없게 무섭다. 적어도 ‘누가 해도 이보다 잘할 수는 없었다’는 호평은 신현빈의 것이다.


사랑받아 마땅한 배우 신현빈 ⓒ

그런데 아쉽다, 이대로 연기 호평만 듣고 끝내기엔. 정말 일말의 반전 가능성이 없을까. 구해원을 진심으로 사랑해서 해원이 진정 자신을 위한 인생을 살아갈 길은 없을까. 깊은 연민과 공감 속에 시청자의 사랑을 받을 길은 없을까. 만만치 않은 아픔을 현재에 이르기까지 짊어지고 있으면서도, 해원과는 달리 밝은 모습을 내보이고 있는 정선우(신동욱 분)에게서 맘대로 답을 찾고 싶다. 연인도 아니건만 인간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혜원의 아픔을 발견하고, 한 발짝 떨어진 자리에서나마 지켜보는 것으로 해원의 인간미를 자꾸만 길어 올리는 사람 정선우.


그리고 실은, 가진 자들에게 맞서 우리를 대변해 유일하게 기죽지 않고 할 소리 하는 구해원 아닌가. 자신의 아픔에 휩싸여 판단력을 잃고 질주하는 조커로 볼지, 거대한 골리앗을 향해 돌을 던지는 다윗으로 볼지는 당신에게 달렸다.


배우 신현빈이 연기 극찬과 함께 장겨울로서 받았던 사랑에 버금가는 아낌을 담뿍 받는 구해원으로서 드라마 ‘너를 닮은 사람’(연출 임현욱, 극본 유보라)을 마무리하기를 시청자로서 응원한다. 회상 속 단발머리 구해원, 햇살 속에 빛나던 사랑스러움. 사람은 사랑받으면 윤이 난다, 배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구해원을 사랑할 시간, 이제 4회분밖에 남지 않았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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