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명대사⑰] 사랑한다는 것(갯마을 차차차)
입력 2021.11.01 14:02
수정 2021.11.02 21:47
두식: 여기, 어떻게 왔어. 내일 온다며.
혜진: 오늘,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서. 좋아해. 나 홍 반장 좋아해. 나는 아흔아홉 살까지 ‘인생 시간표’를 짜놓은 계획형 인간이야. 선 넘는 거 싫어하는 개인주의자에, 비싼 신발을 좋아해. 홍 반장이랑은 정 반대지. 혈액형 궁합도 MBTI도 어느 하나 잘 맞는 게 하나도 없을걸. 크릴새우 먹는 펭귄이랑 바다사자 잡아먹는 북극곰만큼 다를 거야. 근데 그런 거 다 모르겠고. 내가 홍 반장을 좋아해.
두식: 치과 나는….
혜진: (손가락으로 두식의 입을 막으며) 아무 말도 하지 마, 뭐 어떻게 해달라고 하는 거 아냐. 자꾸 내 마음이 부풀어 올라서 이러다가 아무 데나 빵 터져 버릴 것 같아.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두식: (혜진의 손을 잡아 입으로 가져오고서는 눈물 가득한 눈망울로 바라보다 입을 맞춘다) 나두, 나두 이제 더는 어쩔 수가 없다. (이어지는 입맞춤)
두식이가 ‘치과’라고 부르는 공진마을의 유일한 치과의사 윤혜진은 윤치과의원의 간호사이자 단짝 친구인 표미선(공민정 분)과 간만에 서울 나들이를 간다. 옷을 그토록 좋아하는 혜진이면서 자꾸 남자 옷에 눈이 가고, 고급 양식을 먹어도 이제 그리 맛있지 않다. 어촌 공진마을이 자꾸만 생각나고 그중에서도 ‘홍 반장’ 두식이 떠오른다. 1박의 약속과 미선을 뒤로 하고 빗속을 달려 공진으로 돌아온 혜진이 두식을 찾아 고백하는 장면이다.
사실 두 사람만 마음의 부인에 부인을 거듭했을 뿐 공진 사람 누가 봐도 둘은 좋아하고 있었고, 두 사람도 알았을 거다. 하지만 성격도 처지도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은 겁도 나고, 이게 상대를 위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누르고 있었다. 사랑과 기침은 감추고 참을 수가 없는 것인지라 누르고 눌러도 가슴은 부풀고…, 혜진이 먼저 용기를 냈다.
혜진이 말하듯 두 사람은 너무 다르다. 생각의 시작부터 다른 두 사람의 주파수가 어느 순간 서로를 향하게 됐다. 다른 걸 알면서도 좋아하지 않을 수 없고, 혼자 좋아하는 것으로는 견딜 수가 없어서 입 밖으로 내는 순간이다. 그 순간 바라는 것은 하나였을 것이다. ‘따로’가 아니라 ‘함께’면 좋겠다. 남이 아니라 우리로 묶이면 좋겠다.
100% 진심으로 시작했음에 틀림이 없지만, 현실은 어김없이 두 사람 앞에 놓인다. 원래 그 자리에 있었고, 지금도 있는 것일 뿐이지만 새삼 현실이 각인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좀 더 서로에 대해 깊이 아는 게 당연 중의 당연, 기본 중의 기본이라 생각하는 혜진은 두식이 지나온 삶을 얘기해 주길 바라지만 두식은 입을 열지 못한다.
고향에 내려와 동장, 통장도 아닌 반장을 자처하며 집집이 온갖 허드렛일을 도와주며 살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향후엔 어떻게 살고 싶은 건지 혜진은 궁금하다. 서로 밥숟가락 몇 개인지 속내를 다 알고 지내는 공진 사람들도 알지 못하는 얘기, 혜진은 직접 듣고 싶다. 하지만 두식에게는 크나큰 상처를 열어 보여야 하는 일이라 쉽지 않다. 나는 창피한 부분과 아픔까지 솔직히 보여준 것 같은데 그러지 않는 두식이 야속한 혜진이다. 혜진은 시간을 갖자고 한다, 헤어지기 전 형식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헤어지고 싶지 않기에 두식의 변화를 기다리겠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연애를 시작하자마자 온 공진이 떠들썩하게 깨를 볶았던 터라 두 사람의 ‘브레이크타임’을 온 마을이 안다. 할아버지 손에 크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홀로 된 두식을 어려서부터 밥 챙겨 먹이며 키운 김감리 할머니(김영옥 분)가 슬쩍 두식에게 훈수를 둔다. 두식이가 ‘감리 씨’라 부르는 할머니는 공진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존재인데, 연애 상담에서도 어른의 지혜가 빛난다.
감리: 두식아. 너 치과 선생이랑 싸웠쟤. 언능 가서 잘못했다고 하고 끌어안나줘. 너 치과 선생 그러다 제풀에 지쳐갖고 나가떨어지면 어떡 할라 그러니. 힘들게 맺은 인연, 끊겨 나가지 않게 니가 잘해야 돼. 두식아, 나는 네 옆에 치과 선생 있는 거 차암 좋다. 사람들한테 잘하는 것도 좋지만 널 위해 살아야 해. 마순(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행복해야 해. 니가 행복해야 내도 행복하고 또 치과 선생도 행복할 거야. 여기 공진 사람들 마카(모두) 다 그렇게 생각할 거라니.
두식: 할머니, 정말 내가 그래도 될까.
감리: 아, 당연하지. 응, 그걸 말이라고 하나. 그간 똥똥거리며(동동거리며) 사느라 고생했다. 이제는 다리 쭉 펴고 편히 살아라.
모든 걸 혜진에게 털어놓고, 스스로를 괴롭히듯 고되게 살아온 지난날은 훌훌 털어버리고 이제 자신을 위해 살아보려고 마음먹은 두식은 혜진에게 시간을 내달라고 말한다. 안타깝게도 두식의 고백 전 아픈 과거가 수면 위로 불거져 모두가 알게 되고, 두식은 마음의 동굴로 들어간다. 행복으로 가는 길이 쉽지 않아 보인다. 엄밀히 말하자면 두식의 잘못이 아니지만, 스스로 깊은 책임을 느끼는 두식이다.
곡기도 끊고 두문불출하는 두식을 문밖으로 끌어내 주는 건 두식이 책임을 느끼는 이들의 사과와 화해, 손대지 않는 걸 알면서도 매일 음식을 두고 가는 감리 씨의 정성, 그리고 자신의 충격보다 두식의 상처를 먼저 생각한 혜진이다. 우여곡절 속에서 두 사람의 사랑도 깊어간다. 그리고 어느 날, 혜진이 먼저 미소 짓는다.
혜진: 아니, 우리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라서.
두식: 엉망진창이었지。
혜진: 최악이었어. 근데 나도 나지만 홍 반장 진짜 황당했을 거야. 처음 본 여자가 신발 찾아달라 돈 빌려달라. 하루 종일 우당탕탕. 근데 그날의 파도가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다 놓은 것 같아. 이 신발(두식이 바다에서 찾아준 구두)이 나한테 돌아온 것처럼. (구두 옆에 남자운동화를 옆에 놓으며) 현관에 우리 신발이 늘 나란히 놓여 있으면 좋겠어, 외롭지 않게. 홍 반장, 나랑 결혼해 줄래?
두식: (놀라며) 아니.
혜진: 싫어?
두식: 아니, 아니. (당황하며) 아니, 그게 아니라 왜 지금.
혜진: 왜?
두식: 나도 오늘 프러포즈하려고 했단 말이야. 내가 먼저 하려고 했는데. 진짜 한참 전부터 준비한 건데.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청혼을 받아 가지구.
혜진: 아니, 누가 먼저가 뭐가 중요해. 우리가 같은 마음이라는 게 중요한 거지. 그럼 이제부터 홍 반장이 해. 내가 바통터치 할게. 이어달리기라고 생각하자. 홍 반장이 마지막 주자야, 결승선에 골인하면 돼.
두식: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혜진: 아냐 할 수 있어! 파이팅!!
두식: (마음을 가다듬고) 아까 우리 처음 봤을 때 최악이라 그랬잖아. 나는 아니었어. 그날 바다에서 어떤 여자를 봤어. 한참을 앉아 있는데 눈빛이 너무 슬퍼 보이는 거야. 근데 그게 자꾸 마음에 밟혔어. 그래서 계속 눈길이 가더라구. 근데 그 여자를 이렇게 사랑하게 될 줄을 몰랐네. (목걸이를 꺼낸다. 혜진이 샀다가 두식이 마음에 걸려서 중고로 팔아버린 500만 원대 귀금속과 같은 제품이다) 내 637시간의 노동과 맞바꾼 목걸이야. 또 중고월드에 갖다 팔기만 해.
혜진: 이 비싼 걸. 안 팔게, 절대. 절대 안 팔게.
두식: 현관에는 신발 두 켤레, 화장실엔 칫솔 두 개, 부엌에는 앞치마 두 벌. 뭐든지 다 한 쌍씩 놓자. 그런 집에서 오늘을 내일을 그리고 모든 시간을 나랑 함께 살자!
혜진: 사랑해.
두식: 나두!
입맞춤은 혼자 못한다, 두 사람의 합심으로 완성된 청혼 장면이 인상적이다. 남자가 주고 여자가 받는 시대는 이미 아니다. 사랑 고백을 혜진이 먼저, 청혼도 먼저인가 싶었지만 함께다. 주방의 앞치마 두 벌에도 두 사람이 살아갈 평등한 모습이 내다보인다.
청혼은 결혼식으로 이어진다. 결혼식 전에 두 사람은 셀프 웨딩화보를 찍으려 하는데, 공진 사람들이 떼로 몰려나와 거든다. 정겹기도 하지만 ‘둘만’이고 싶은 두식과 혜진은 손을 잡고 달린다, 할아버지가 남겨 주신 두식의 배가 있는 언덕까지. 숨을 헐떡이는 혜진의 눈에 배 측면에 적인 ‘순임’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혜진: 이 배 이름이 순임호였어? 귀엽다. 꼭 사람 이름 같아.
두식: 맞아 우리 할머니 함자야.
혜진: 아, 할머니셨구나. (할머니신 듯 글자를 향해 꾸벅) 죄송합니다. 할아버지가 진짜 사랑꾼이셨다, 그런 것 좀 배우지. 이 배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거면, 여기다 조그맣게 윤혜진이라고 써 주면 안 돼?
두식: (짐짓 정색하고) 어, 안 돼!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 뒤에) 앞에다 써 줄게, 이렇게 대문짝만하게.
혜진: 알았어, 내가 맨 앞에서 홍 반장 가는 길을 활짝 열어 줄게!
두식: 늘 이렇게 잔잔하지는 않을 거야. 풍랑도 있을 거고, 태풍이 불어닥치는 날도 있을 거야.
혜진: 비 좀 맞으면 어때. 바람, 좀 불면 어때. 우리가 같이 한배를 탔는데.
매사 신중하고, 좋은 면뿐 아니라 거기에 끼어들 고난도 생각하는 두식. 그걸 모르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함께이므로 헤쳐 나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혜진. 둘의 다름이 전혀 불안해 보이지 않는다. 이제부터 두 사람은 함께니까, 웃음과 눈물이 곁들여진 행복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