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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결정적 장면⑤] 작품 전체를 뒤흔든 마지막 장면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입력 2021.09.04 14:26
수정 2021.09.04 14:26

박찬욱 감독의 첫 번째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의 스틸컷 ⓒ왓챠 제공

20세기의 마지막 해였던 2000년, 세기말 분위기가 물씬했던 1999년에 제작된 영화 ‘글루미 선데이’를 봤을 때 매료됐다. 주제곡 ‘글루미 선데이’는 영화 초반의 대사처럼 정말 ‘저주의 노래’일 것만 같고,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사랑하는 새로운 남자의 등장에 연인을 빼앗길까 봐 공존을 도모하는 모습은 당시로선 어리둥절하면서도 신선한 정도에 비례해 심적 충격이 있었고, 분명 60년 전 한을 푼 모자가 축배를 드는 해피엔딩으로 끝남에도 깊은 우울감을 남길 만큼 폐부 깊숙이 자리 잡았다.


영화를 볼 때는 인상적 첫 장면도 기막힌 마지막 장면도 절대로 잊지 않을 것 같지만, 실제론 잘 생각나지 않는다. 첫 장면은 그 뒤에 온 하이라이트 장면에 덮이고, 마지막 장면은 절정의 장면에서 느꼈던 긴장과 기쁨, 슬픔과 절망 그 어떤 감정을 쓸어내리며 엔드 크레딧을 마음으로 준비하던 느낌이 되레 더 생생하다.


드물게 마지막 장면이 뇌리에 오래도록 남는 영화들이 있다. ‘유주얼 서스펙트’나 ‘식스 센스’처럼 기막힌 반전이 있을 때도 그렇지만, 그 인물들이 그 순간 느낀 복잡한 감정이 온전히 공유됐을 때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꾹꾹 눌러왔던 내 감정이 함께 폭발한 영화도 잊기 어렵다.


물론 마지막 장면이라는 게 자로 재듯 정확히 엔드 크레딧 직전의 장면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이러한 일이 가능한 건 ‘감독의 의도’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스토리에서 작품의 절정을 의도적으로 마지막까지 늦춘 경우, 결말 부분에서 절정을 맛보고 그 장면을 짜릿하게 기억한다. 또는, 이야기상 절정이 이미 지난 건 분명한데 감독이 마지막 장면에 에너지를 쏟아놓으면 압도적 장면으로 각인된다.


영화 '글루미 선데이' 스틸컷 ⓒ수입 그린나래미디어㈜, 배급 ㈜팝엔터테인먼트

‘글루미 선데이’는 전자의 경우다. 영화는 수미쌍관, 북 엔딩(book ending) 기법으로 연출돼 처음과 끝이 같은데 첫 장면의 비밀이 마지막에 밝혀진다. 사실 첫 장면에 쓰러진 사람, 그가 사망한 것으로 모든 게 해결될 것도 없고 결코 합법의 방법도 아니지만. 처음과 끝 그 사이를 채운 회상에서 전해지고 잉태된, 세 주인공의 애절한 이야기와 홀로코스트 대학살이라는 전대미문의 비극을 향한 슬픔과 분노가 마지막에 이르러 폭발하도록 영화가 짜였다.


폭발하는 것은 관객의 마음속이다, 영화 속 어머니와 아들은 차분하게 움직인다. 어머니는 쓰러진 남자의 80세 생일을 기념하는 롤스테이크에 꽂았던 ‘숫자 80 장식’을 닦는다, 특히 음식에 꽂혔던 기다란 침, 검게 변한 부분을 박박 닦는다. 옆에 놓인 작은 갈색 병도 닦는다. 아들은 아이스버킷에 담가 놓은 샴페인을 꺼내 미리 준비해 둔 샴페인 잔에 따른다. 세척을 마친 어머니에게 잔을 건네고 두 사람은 잔을 부딪고 포옹한다.


80 장식 침에 묻힌 독이 담겼던 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다. 두 사람은 한마디 말조차 나누지 않는다. 그들 내면에서 일어나는 전율, 화면에 표현되지 않은 것을 고스란히 관객인 우리가 체감한다. 사적 복수인데 역사적 단죄로 느껴 마음의 동의를 얻어내는 것은 롤프 슈벨 감독의 몫이었는데, 설득해 냈다.


찰리와 칼릴의 첫 만남 ⓒ출처=네이버 블로그 sumtokki

‘리틀 드러머 걸’은 후자의 경우, 감독이 에너지를 부어 방점을 찍어 놓은 사례다. ‘글루미 선데이’의 마지막 장면이 첫 장면의 비밀을 풀었다면 박찬욱 감독의 첫 번째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의 마지막은 작품 전체를 흔들고, 왜 내가 6부작을 보는 내내 이토록 불안·초조했는지 알게 되고, 이 드라마를 어떤 관점에서 봐야 하는지가 선명히 드러나며 1부로 돌아가 새로 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그렇게 만드는 장면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떠오르는 지도자이자 두뇌 역할을 하는 칼릴(셔리프 가터스 분)이 이스라엘 첩보 조직 모사드의 공격을 받아 죽기 직전, 자신에게 덫을 놓은 스파이 찰리(플로렌스 퓨)와 대화하는 장면이다.


매사 신중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던 칼릴은 찰리에게 경계를 풀었다. 찰리가 원인이 되어 남동생이 목숨을 잃은 걸 알면서도 경계를 풀었다. 칼릴은 자신을 향한 총구가 코끝까지 온 상황에서도 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대한 궁금증을 풀고 싶어 한다.


이스라엘을 도와 아랍인의 땅을 유럽인에게 내준 서방 국가, 그중에서도 가장 앞장섰던 영국의 사람이면서도 팔레스타인의 신념에 귀를 기울이고 동생을 도와 테러에 가담했던 찰리였기에 믿었던 건 작은 부분일 것이다. 세상과 단절된 채 안가에서 작전을 계획하고 지시하던 외톨이 앞에 나타난 천방지축 생기 넘치는 찰리에게 매혹당한 사내라는 게 경계를 푼 이유에 대해 더 큰 설명력을 지닐 것이다.


"누구를 위해 일하나" 찰리의 '진영'과 행동 동기를 묻는 칼릴 ⓒ출처=네이버 블로그 sumtokki

칼릴은 궁금하다. 금단의 구역에 원칙을 깨고 찰리를 들인 자신의 잘못으로 죽음을 맞게 된 상황은 받아들인다 해도, 도대체 찰리는 누구이고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지 궁금하다. “누구를 위해 일하나, 당신은 뭔가?”라는 질문에는 칼릴을 비롯해 세상의 편견이 그대로 담겼다. 누구를 위해 일하나, ‘진영’과 소속을 묻는다.


칼릴 입장에서 찰리는 영국인이므로 정치적 입장에서 자신들의 땅을 빼앗는 데 일조한 영국의 첩보기관 소속인 건지, 종교적 신념 차원에서 유대교인 것인지, 그도 아니면 짐작도 못 했으나 유대인이고 이스라엘 모사드 요원인지, 찰리를 움직인 동기가 궁금하다. ‘동기’를 중시하는 칼릴의 신념은 “이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기를…”이라는 쓰러지기 전 마지막 말에서도 읽힌다.


문제의 동기를 밝히는 찰리의 답이 기막히다. 찰리는 눈물범벅이 된 채로 말한다, “나는 배우예요”. 칼릴 입장에서는 기도 안 찼을 것이다. ‘배우’라는 말을 신념과 아무런 상관 없이 그저 돈을 받고 움직인 꼭두각시로 들었기 십상이고, 신념이 중요한 칼릴에게 신념은 고사하고 소속된 조직조차 없다는 것은 허무를 부추겼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가치’를 말하며 스러져갔다.



"나는 배우예요" ⓒ출처=네이버 블로그 oopsyaong

개인적으로 충격이 큰 대사였다. 뇌에 한방, 마음에 한방, 연타를 때리는 대답이었다. 그렇다, 흔히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일에 가담할 때는 신념이든 막대한 돈이든, 명분이건 실리건 배경이 있고 동기가 관여한다. 그런데 찰리에게는 자신이 ‘배우’라는 것이 이 엄청난 국제적 첩보 작전에 자신을 내던진 계기이고 이유라는 것이다. 스파이를 넘어 배우라는 숙명의 정체성, 배우를 넘어 인간 행동의 동기, 동기를 넘어 우리의 정체성을 되돌아보게 하는 답이다.


이 한마디에 드라마 1~6부가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쳤다. 찰리 로스는 관객도 적고 무대 소품도 초라한 극단의 무명 배우다. 찰리는 낭중지추다. 그의 연기와 에너지는 동료들과는 두드러지게 뛰어나서 ‘주머니 속 송곳’처럼 삐져나온다.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하고 모험과 도전을 즐기는 패기도 당차다.


스스로 알고 있다. 자신이 이 작은 극단에서 썩기엔 너무 아깝고 더 많은 이로부터 인정의 박수를 받아야 하는 배우임을. 그런데 어이없게도 남자 동료가 미국 할리우드에 작은 배역을 맡아 극단을 벗어난단다.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고 싶은 찰리의 마음이 급한 차, 드라마 오디션 제안이 들어온다. 찰리는 언제나 그랬듯 자신만만하게 연기했고, 심사진도 이를 아는 것 같다.


2차 오디션에 초대된 찰리에게 제안되는 드라마는 안방극장으로 보는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 국제 첩보전의 무대다. 찰리는 갈등하지만 받아들인다. 스파이 임무를 수행하는 중간에도 마음에 ‘브레이크’가 밟히는 사건과 죽음이 발생하지만, 갈등 끝에 또 받아들인다. 받아들이지만 스스로 선택하는 찰리이고, 스스로 선택하나 찰리 머리 꼭대기에 선 모사드 조직의 큰 그림에서 벗어나지 않는 선택이다.


'동인'를 묻는 질문에 '정체성'으로 답하는 찰리 ⓒ출처=네이버 블로그 oopsyaong

드라마를 보는 내내 생각한다. 찰리는 왜 이 일을 선택했을까. 가짜를 진짜로 만드는 마술인 연기, 그 마술의 극치를 현실 무대에서 펼쳐 보이며 자신의 재능을 스스로 재차 확인하고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걸까. 새로운 것에 눈이 반짝이고 도전에 움츠러들기는커녕 아드레날린이 솟는 DNA 때문인가. 자신을 스파이로 조련하고 훈련하는 가디 베커(알렉산더 스카스가드 분)에게 인간적 호감을 넘어 이성적 매력을 느끼기 때문인가. 아니, 감성 풍부한 배우답게 벌써 가디를 사랑하게 된 것인가.


그 전부일 수도 있지만, “나는 배우예요”라는 답에서 찰리의 선택과 행동의 배경이 온전히 이해됐다. ‘배우’라는 것은 그 사람이 믿는 정치적 신념이나 종교와 같은, 다른 사람의 신념이나 종교와 구분되는 진영 이하의 답이 아니다. 그에 맞먹는, 아니 그 이상으로 한 인간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키워드라는 걸 박찬욱 감독이 일깨운다. 자신을 세상에 입증하는 일에 자신을 던져 매진하는 모습이 어디 찰리의 것이기만 한가. 스파이와 배우의 공통점이고, 그들의 특성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나는 배우예요”는 드라마의 원작이 된 존 르 카레의 동명 소설에는 없는 말이다. 소설에서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고, 그 남자를 사랑했기 때문에”라고 칼릴에게 답한다. 드라마와 전혀 결이 다른 답이다. 드라마 속 찰리에게는 의미, 신념보다 배우라는 자신의 정체성이 중요한 동인이다.


가디를 사랑하는 마음이 단계 단계의 브레이크를 액셀레이터로 바꾸는 건 사실이지만, 찰리는 남자를 향한 사랑 하나로 움직이는 인물도 아니고 자기애가 더 큰 사람이다. 그 사랑이라는 것도 임무 수행 중 칼릴에게 진심 반해서 그가 체포되지 않도록 추적기 역할을 하는 라디오의 배터리를 빼지 말라고 말리고, 작전의 비밀을 모두 털어놓기도 한다.


영국 드라마에서도 아름다운 미장센을 찬란하게 펼친 박찬욱 감독 ⓒ왓챠 제공

박찬욱 감독은 “나는 배우예요”라는 답이 앞뒤 맞는 진심이 되도록 원작에서 뺄 것들을 미리 추려냈다. 이스라엘 모사드의 고위직 요원이자 칼릴 제거 작전을 수행하는 팀의 수장인 마티(마이클 섀넌 분)가 찰리를 스파이로 캐스팅하며 약속한 할리우드 진출이나 고액의 수당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남자친구에게 폭행당하거나 수동적으로 선택하는 모습은 배제하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인물로 그렸다.


그러했기에 마지막에 이르러 “나는 배우다”라는 말, 찰리를 움직이게 한 동인에 무게가 실린다. 나는 배우여서 누구든 될 수 있고, 본 적 없는 사람(칼릴 동생)의 절절한 연인으로 모두가 믿게 할 수 있고, 모두의 의심을 늦출 수 있다. 나는 현실이라는 무대, 360도 전방위에서 나를 지켜볼 수 있고 수많은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서도 나는 당신들을 속였다. 가짜를 진짜로 만들었다. 이 얼마나 짜릿한 연극인가.


박찬욱 감독이 2019년 국내 상영 당시 씨네21과 진행한 인터뷰를 참조하면, “나는 배우예요”라는 대사는 첩보원 출신의 작가 존 르 카레의 여자 동생이자 소설의 실제 모델에게서 나왔다. 박찬욱 감독은 배우이자 드라마 제작을 앞두고 정치적 활동에도 가담한 바 있는 샬롯 콘웰을 인터뷰했다. 당시 누가 머리에 총을 겨눈 것도 아닌데 찰리는 왜 이런 위험한 일을 했는지 물었고, 샬럿은 “배우니까.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한가?”라고 답했단다. 호기심, 모험심, 쉽게 사랑에 빠지는 기질을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박 감독은 ‘배우니까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대답에서 영감을 받아 “나는 배우다”라는 대사를 썼다.


찰리 로스와 그를 스파이로 교육시킨 전설의 스파이 가디 베커(왼쪽) ⓒ국내 첫 방영 매체 채널A제공

그렇게 해서 드라마의 시작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주인공 찰리의 행동을 조명하는 대사가 탄생했고, 그것에 맞추어 찰리의 선택과 플로렌스 퓨의 연기가 조율됐다. 마지막을 모르고 볼 때는 그 선택들이 많이 충동적으로 불안해 보이고, 찰리의 행동과 플로렌스 퓨의 연기가 다소 산만해 보일 수 있는데 이 장면을 보고 나면 그 모든 것이 새로이 해석되며 적절해 보인다.


영화 ‘글루미 선데이’와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의 한 장면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적었지만, 전체 줄거리나 인물들에 대해선 소개하지 않았다. 마지막 장면도 극히 일부분을 기술했다. 직접 체감하기를 바라서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전체의 ‘궤’가 맞춰지는 느낌 또는 마지막에 알게 된 바를 쥐고 처음부터 다시 보고픈 열망에 사로잡히는 경험, 놓치기엔 아깝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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