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배우발견④] 박찬욱 스파이 드라마 속 그 남자
입력 2021.08.30 14:30
수정 2021.09.12 12:55
‘양질전화’라는 말이 있다. 독일의 관념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이 밝힌 법칙이다. 일정 규모 이상으로 양이 쌓이면 질적 비약이 일어난다는 것으로, 물리에도 화학에도 사람의 인식에도 적용된다.
영화 취재를 오래 하다 보니, 배우들을 장시간 지켜보다 보니 ‘연기력’에도 유의미한 법칙이라는 생각이 든다. 재능 면에서 출발선이 같은 배우라도 다양한 작품을 통해 단련되다 보면, 기회를 얻지 못한 배우보다 분명 더 성장해 있다. 특히 좋은 감독과 작품을 만나면 더 많은 양이 한 번에 축적되기도 하고, 주목할 만한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양질전화의 순간’을 맞기도 한다.
오늘 얘기하고픈 배우가 스웨덴 출신이다 보니 그의 전작을 다 관람하지 못했고, 한국 배우처럼 곁에서 쭉 지켜본 게 아니라 다소 공감받기 어려운 어려운 주장을 할 수도 있다. 그러함에도 기사를 쓰고자 한 건, 때로는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볼 때 그 ‘변화’가 눈에 띄기도 한다는 변명을 전제로 이 배우에 대한 애정을 표하고 싶어서다.
외곽에서 빙 돌아 들어와 꺼내는 이름은 ‘알렉산더 스카스가드’이다. 스웨덴 이름을 영어로 읽고 한국어로 표기하려니 쉽지 않은데, 그의 성에 관한 여러 가지 표기가 있으나 그의 아버지(스텔란 스카스가드,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맘마미아’ ‘어벤져스’ 등의 조연)를 시작으로 배우를 하는 두 명의 동생들(구스타프, 빌)까지 스카스가드로 적고 있어 이를 따른다.
사실 배우 알렉산더 스카스가드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주로 외모가 보이는 배우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이다. HBO TV 시리즈물 ‘트루 블러드’(2008~2014)의 뱀파이어, 진짜 뱀파이어가 있다면 저렇게 생기고 저렇게 섹시하지 않을까 싶은 외모가 돋보였다. 194cm의 키(더 커 보이지만)에 얼굴이 작아 ‘미친’ 비율을 자랑하고, 몸매는 늘씬한데 어깨는 넓어 캘빈 클레인을 비롯해 패션 브랜드 화보에 종종 등장했던 터라 편견이 강화됐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레전드 오브 타잔’(2016)에서는 특히 엄청난 근육이 먼저 보였다. 주로 수영이나 미식축구, 투포환을 했던 스포츠선수들이었던 역대 타잔에 못잖게 190cm가 넘는 키에 넓은 어깨가 타잔과 잘 어울렸는데. 영국 문명사회로 돌아갔던 타잔이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돌아와 밀림과 생태계를 파괴하려는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정치적 활동가 모습에는 과한 근육이라고 생각했다. 1980년대 매주 챙겨 보던 외화 ‘타잔’(미국 NBC 19060년대 후반~70년대 초반 방영) 속의 타잔, 대역 없이 액션을 소화했다던 존 엘리가 ‘타잔의 표본’이었던 선입견에 따른 ‘이질감’도 컸을 것이다.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정서적으로 다가온 것은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2011)였다. 커스틴 던스트(저스틴 역)의 남편 마이클 역으로 등장하는데, 정서적 우울감과 광기 어린 행동을 보이는 아내를 어르고 달래 어떻게든 안정시켜 난장판이 된 결혼식이 결혼까지 망치지 않게 애쓰는 ‘인내심 있는’ 역할을 멋지게 냈다.
‘멜랑콜리아’에서 살짝 봤던 멋짐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을 드디어 만났다. ‘리틀 드러머 걸’(2018년 영국과 미국에서 방영, 국내에서는 2019년 방영)이다. 현재는 왓챠에서 ‘감독판’을 볼 수 있다. 6부작으로 되어 있어 알렉산더 스카스가드의 매력을 나름 오래도록 지켜볼 수 있고, 언제든 다시 보기도 된다.
많은 분께서 아시듯 ‘리틀 드러머 걸’은 박찬욱 감독의 연출작이다. 우리에게는 다소 낯설고 어려울 수 있는 이스라엘 모사드와 팔레스타인 혁명군 사이의 전쟁, 그중에서도 첩보전을 통해 심리전을 넘어 ‘나는, 그리고 너는 누구인가’라는 인간의 정체성을 묻는 대작이 우리나라 감독, 그중에서 박찬욱이라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두 배 더 재미있고 뿌듯한데. 그 와중에 남자주인공 가디 베커가 너무 멋있고, 눈을 씻고 보니 냉정한 조련사이자 오랜 스파이 생활 속에서도 인간미를 잃지 않은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가 알렉산더 스카스가드이다.
역시나 배우는 좋은 감독과 작품을 만나면 성장하고, 양질전화의 순간을 맞는다. 영화 ‘작은 아씨들’과 ‘블랙 위도우’를 통해 급부상하고 있는 플로렌스 퓨는 할리우드 진출 전에 박찬욱의 디렉팅 속에서 성장했고, 알렉산더 스카스가드는 여덟 살 데뷔 이래 축적돼 온 연기가 박찬욱을 만나며 질적 비약을 이뤘다.
이스라엘 모사드 첩보조직의 일원인 가디 베커는 전설의 스파이지만, 근래 수년간 상사와 동료들에게 권태가 읽힐 만큼 무의미하고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군인 출신이고 유대인이며 장기적 안목으로 오늘을 선택한다. 감정에 흔들리는 법 없이 차분하며 과묵하다.
생기 없던 가디의 눈이 오랜만에 반짝 빛나니 찰리 로스(플로렌스 퓨 분)가 신입으로 들어오면서부터다. 가디는 부모가 아이를 키우듯 무명 연극배우 찰리를 첩보원으로 조련한다. 전에 없던 감정이 새어 나오기도 하고, 오래도록 일해 온 상사 마티(마이클 섀넌 분)와 동료들 앞에서조차 벗지 않던 스파이 가면이 슬쩍 들려 본래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찰리 앞에서는.
길쭉한 몸매와 드문 비율이 여전함에도 ‘리틀 드러머 걸’에서는 알렉산더의 외모에 눈이 가지 않는다. 미세한 표정과 눈동자 움직임에 집중하게 되고 새어 나오는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아, 이 배우가 이렇게 연기를 잘했던가. 40대로 접어든 후 얼굴에 분위기가 드리우고 하관을 덮은 짧은 수염이 잘 어울리는 영향인지 섹시가이 이미지는 온데간데없고 진정 배우로 보인다.
현실과 맞닿아 있는 캐릭터도 가디의 진정성을 배가시킨다. 알렉산더 스카스가드는 해군에 복무하며 테러리스트 진압 임무를 수행했다. 아버지가 첫 번째 결혼에서 6남매, 두 번째 결혼에서 2명의 형제를 얻어 7남 1녀의 장남인데. 종종 유아기의 이복동생을 자식처럼 안고 다니기도 하고, 유일한 여동생을 따뜻이 감싸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나이 차 있는 남동생들과 어릴 적 일화를 얘기할 때도 애정 넘치는 맏형의 면모를 드러내기도 했다. 현실 속 알렉산더의 부성애 같은 우애와 인간미 덕에 찰리를 키우고 아끼는 모습의 설득력을 높인다.
‘리틀 드러머 걸’은 연극 무대에서 첩보 무대를 자리를 옮긴 찰리의 불안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찰리의 불안이 더욱 강렬해 보이는 건 정중동의 연기를 하는 알렉산더를 통해 빚어진 가디가 있어서다. 찰리의 사랑이 외로움으로 목메다가 갈증을 풀고 뒤돌아서다 되돌아오는 마력은 가디의 ‘베이스캠프’ 같은 힘에서 나온다. 찰리의 갈등이나 변화의 모습이 배신과 변절로 보이지 않는 것, 의심을 불러일으키다가도 믿음을 갖게 하는 것도 가디를 향한 찰리의 인간적 신뢰와 사랑을 우리가 보았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스카스가드는 의연한 가디의 면모들을 보일 듯 보이지 않게, 표날 듯 표나지 않게 연기했다.
가디의 하이라이트 장면은 찰리가 칼릴(셔리프 가터스 분)과 함께 그의 집에 있을 때, 창밖에 서 있을 때다. 습격을 위해 유혹을 넌지시 언급한 게 본인이면서도 그것을 실행하는 찰리를 지켜보는 모습에서 의식과 감정의 ‘이중노출’이 보인다. 겉으로 드러난 전면에는 작전의 온전한 수행과 찰리 요원에 대한 보호 의식이 드러나지만, 언뜻언뜻 눈빛과 표정에 질투가 서린다.
이중노출은 스크린에 영화가 흐르는 가운데 필름 컷 사이 사이에 달콤한 팝콘과 청량한 콜라 장면을 넣어 소비를 부추기는 수법이다. 이론대로라면, 눈에는 명확히 보이지 않고 의식은 봤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무의식은 이를 잡아내 먹고 싶고 마시고 싶다는 입맛과 갈증을 유발한다. 알렉산더 스카스가드의 연기가 딱 그러하다. 겉으로 선명히 보이지 않지만 분명 질투의 감정이 함께 발산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그에 대해, HBO 드라마 ‘빅 리틀 라이즈’(2017)에 함께 출연한 180cm가 넘는 배우 니콜 키드만마저 커 보이지 않게 하는 상대 배우라는 식의 외모에 관한 주목은 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깊어진 눈빛과 귀를 파고드는 좋은 목소리, 과하지 않아서 더욱 탄탄하게 다가오는 연기를 어서 다시 보고 싶다. 아름답고 찬란한 첩보물 ‘리틀 드러머 걸’의 시즌2를 앙망하고, 그전에 넷플릭스 공개가 예고된 영화 ‘패싱’이 등록되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