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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저계급론', 최소한의 형평성 확보로 '기회평등' 보장돼야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17.01.18 09:23
수정 2017.01.18 09:35

'소득불균형'보다 '세습재산 불평등'이 더 큰 사회구조 때문에 분노

사회적 형평성·공정성과 개인 자유 및 재산권 사이 사회적 합의 필요

SNS 상에 떠도는 수저론 기준표 ⓒ미미미님 블로그 캡처

'소득불균형'보다 '세습재산 불평등'이 더 큰 사회구조 때문에 분노
사회적 형평성·공정성과 개인 자유 및 재산권 사이 사회적 합의 필요


토머스 크롬웰(1485~1540)은 근대 영국의 기반을 닦은 사람 중의 하나로 평가 받고 있는 인물이다. 종교개혁을 통해 영국을 완전한 주권국가로 변모시켰고, 의회를 국가 운영의 중심축으로 만들었으며, 근대적인 사회복지 제도의 효시하고 불리는 빈민법을 만들었다. 그는 천대받는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스스로의 노력으로 국가를 경영하는 자질과 경륜을 갖추어 1532년부터 8년간 헨리 8세의 수석장관을 지냈다.

영국 크롬웰은 개인 능력과 업적에 따라 가치 배분되는 '공훈 법칙' 세워

‘은총의 순례(Pilgrimage of Grace)’는 1536년 요크셔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란이었는데, 반란군이 내건 핵심 요구사항 중 하나가 크롬웰을 고위공직에서 배제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그의 신분이 너무 미천하다는 것이었다. 여전히 엄격한 계급질서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들은 대장장이 아들 출신의 정책 결정자를 사회적으로 용납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크롬웰은 당대 일급의 인문학자들을 내세워 관직, 작위, 명예의 배분은 혈통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과 업적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른바 ‘공훈의 법칙(principle of merit)’을 내세워 스스로를 방어해야 했다.

1789년 프랑스에서는 대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은 엄청난 변화와 숱한 상처를 남긴 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의 손에 프랑스의 미래를 넘겨주었다. 나폴레옹이 인류에게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은 그가 숱한 전쟁터를 무대로 만들어낸 영웅적 무용담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나폴레옹 법전’이라고 부르는 ‘프랑스 민법전’이다. 나폴레옹 법전은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프랑스 전 지역과 전 국민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첫 통일법전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이 법전을 가장 자랑스러워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그 안에 잘 구현된 ‘자유’의 이념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계급을 없앤 것이다. 귀족이라는 고귀한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 지배해온 사회체제를 영원히 종식시키고, 능력에 따라 출세하는 새로운 세상을 선포한 것이었다. “나는 모든 곳에 자유의 씨를 뿌리겠다.”며 전쟁터로 떠난 그가 늘 손에 들고 다니던 것이 바로 나폴레옹 법전이었다. 그 결과 유럽 곳곳에 자유주의의 뿌리가 내려졌다.

나폴레옹은 계급을 없애고 능력에 따라 출세하는 '자유의 씨' 뿌려

19세기 프랑스의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는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해에 태어났다. 평범한 서민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나폴레옹이 약속한 사회적 평등과 공훈의 법칙을 믿고 출세를 꿈꿨다. 처음에는 높은 수입과 안정된 생활을 위해 법률을 공부했으나 더 큰 성공을 위해서 작가가 되기로 했다. 그러나 유명 작가가 되는 것이 그리 쉬울 리 없었고, 생계를 위해 손댄 인쇄업이 실패한 데 이어 광산에 대한 투자도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그런 그가 28세에 다시 돈을 벌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작품이 《고리오 영감》이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어보면 발자크가 살던 19세기 초의 프랑스는 나폴레옹 법전에도 불구하고 ‘계급 없는 사회’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소설의 주인공 라스티냐크는 법률가가 되고자 하는 시골 출신의 가난한 청년이었다. 그는 원래 ‘밤낮으로 공부해서 그 노고의 대가로만 성공하고 싶어 하는’ 순수한 청년이었지만 냉정한 현실과 마주치면서 점차 다른 사람으로 변화해 나간다. 그가 당면한 사회는 법적인 계급은 사라졌지만 금권을 앞세운 사실상의 새로운 사회계급이 힘을 떨치고 있었다. 싸구려 하숙집 옆방에 사는 고리오 영감은 그러한 금권사회의 일원이었으며 또한 희생자였다. 그는 한때 제면업으로 성공한 사업가로 부와 권력을 누렸는데 자식에게 돈을 많이 주는 것을 자신의 사랑으로 등치한 왜곡된 부성애(父性愛)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런 그가 돈이 떨어지자 두 딸은 그를 배신했다. “아, 내가 재산을 거머쥐고, 자식들에게 주지 않았다면, 딸들이 지금 내 곁에 와있을 텐데, 그 애들이 내 뺨에 키스를 해줄 텐데…”라며 때늦은 후회를 한다.

보트랭은 하숙집의 또 다른 방에 사는 탈옥수인데, 라스티냐크에게 접근해서 범죄를 부추긴다. 그는 라스티냐크에게 돈 많은 은행가인 타유페르의 딸 빅토린과 결혼한 뒤, 타유페르의 유일한 상속자이자 빅토린의 오빠를 죽이면 그 집 재산을 모두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보트랭은 망설이는 라스티냐크에게 이 세상에는 ‘법과 원칙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사건과 상황만이 존재한다’며 이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즉, 사건을 치밀하게 준비하여 깨끗하게 범죄를 수행한다면 쉽게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 보트랭이 체포되면서 이 범죄는 성사되지 않았지만, 라스티냐크는 결국 세속적, 물질적 욕망에 투항하고 만다.

라스티냐크는 세습재산의 불평등이 소득 불균형보다 훨씬 큰 사회 구조에 타락

라스티냐크가 타락하게 된 것은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할 수 없다는 현실 인식이었다. 그가 아무리 성공한 법률가가 되어 최고 수준의 소득을 올리더라도 막대한 세습재산으로 올릴 수 있는 소득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소설을 보면, 당시 성공한 법률가의 소득이 연 5천 프랑이었다. 그런데 고리오 영감의 딸들이 각각 결혼 지참금으로 가져간 50만 프랑을 연간 소득으로 환산하면 2만 오천 프랑이었고, 보트랭이 부추긴 대로 범죄를 저질러 타유페르의 재산 100만 프랑을 차지했다면 이를 통해 연 5만 프랑의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세습재산의 불평등이 소득 불균형보다 훨씬 큰 사회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1948년 제헌헌법에서 계급을 부정한 대한민국‒ 그로부터 7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오늘날 난데없는 ‘수저계급론’이 세상을 흔들고 있다. 부모가 자식을 뒷받침해주는 능력에 따라 그 능력치가 높으면 ‘금수저’, 낮으면 ‘흙수저’라는 것이다. 부모의 경제적, 사회적 수준이 자식들이 어릴 때 받을 수 있는 사교육 수준에서부터 졸업 후 취업과 경제생활에 이르기까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발자크가 묘사한 19세기 프랑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학생의 잠재적 능력보다 부모의 경제적 수준이 서울대 입학에 더 큰 영향을 준다는 연구결과가 나오는 것을 보면 ‘수저계급론’이 완전히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닌 모양이다.

부모의 경제적 수준이 서울대 입학에 영향 준다니 '수저계급론' 근거 있어

작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영국의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 결과나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을 두고 ‘분노의 정치’라는 표현이 등장했는데, 급기야 이 표현이 우리나라 조기대선 정국을 앞두고 등장하기 시작했다. 수저계급론을 실제 현실로 인식하는 2030세대 ‘뿔난 청춘들’이 너도나도 대선에 참여하여 정치판을 바꾸려한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최순실 국정농단’에 대한 청년들의 분노와 허탈감은 이미 이들의 촛불 참여로 증명되었고, 여기에다 실질적인 청년 실업률이 30 퍼센트에 달한다는 분석까지 나오는 걸 보면, 세상을 바꾸어보려는 청년들의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해 보인다.

지난 주 정치권에서 쏟아져 나온 뉴스 상당수가 청년 대책과 관련이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서울시에서 집행하는 청년수당을 두 배로 올리겠다고 밝힌 데 이어 서울대를 없애고 전국의 국립대와 공립대를 통합하여 운영하겠다는 사실상의 대선 공약을 내세웠다. 지난 주 귀국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기자회견에서 “젊은이의 보다 밝은 미래를 위해서 길잡이 노릇을 하겠다”고 했다. 민주당 싱크탱크인 더미래연구소는 교육부 폐지를 골자로 한 차기정부 조직 개편안을 내놓았다. 이는 시작일 뿐, 2030세대를 겨냥한 정치권의 구애성 공약은 앞으로 치열한 경쟁을 거치면서 어디로 튈지 모른다.

'수저계급론' 회자는 기회 평등 위해 요구되는 최소한의 형평성·공정성 작동 않기 때문

이른바 ‘수저계급론’이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우리 사회가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자유민주주의 질서 내에서 평등을 추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평등은 절대적 평등이나 결과적 평등이 아니라 상대적 평등과 기회의 평등일 것이다. 청춘들이 분노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바로 이러한 상대적 평등과 기회의 평등을 위해 지켜져야 할 최소한의 형평성과 공정성이 작동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이 문제는 상속세, 소득세, 재산세를 어떤 방식으로 또한 어떤 비율로 결정해야 하는지, 사교육을 폐지하고 보편적 교육을 실시할 것인지, 주택 공급정책을 어떻게 할 것인지 하는 정책 문제와 긴밀하게 연관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들은 경우에 따라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보장하고 있는 또 다른 가치인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을 침해할 여지가 있으므로 반드시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기본적인 동의 또는 합의가 필요하다. 이는 사회적 형평성과 공정성을 위해 각 개인이 어느 수준까지 자신의 것을 희생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절차이기도 하다. ‘뿔난 청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선심성 공약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이다.

글/허구생 단국대 교수·역사학 박사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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