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바꾼 요한 바오로 2세, 그렇지 못한 프란치스코

<굿소사이어티 칼럼>한반도 평화 구축할 역사적 기회를 놓친 게 안타깝다

재위 중 두 차례 한국을 찾았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자신의 조국 폴란드를 찾은 것은 그보다 몇 년 앞선 1979년의 일이다. 공산당 치하의 폴란드에선 그가 가는 곳마다 구름 인파가 몰려들었고, 교황은 그때마다 핍박 받는 동포들에게 "두려워말라!"며 직접적이고도 감동적인 메시지를 주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전체주의 압제에 저항하라는 유도였다.

그 장면을 TV뉴스로 지켜보며 무릎을 친 것은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교황이야말로 폴란드 운명을 결정할 열쇠라고 갈파했다"는 게 리처드 알렌 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증언이다. 실제로 1982년 로마에 회동한 두 지도자는 공산주의 패망에 대한 비전을 확인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역사의 잿더미 위에 던져질 것"이라는 담대한 예언과 함께 자유를 위한 십자군 운동을 주창했다.

냉전이 한창이던 당시 그런 비전은 냉소적인 좌파 지식인들로부터 백일몽으로 치부됐지만, 아무도 몰랐다. 두 지도자의 놀라운 비전과 공동 행보가 10년도 채 안 돼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라는 세계사적 드라마를 이끌어낸 것이다. 둘의 만남을 전후해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노조가 출범(1980년)했고, 그게 소련제국 몰락의 쐐기로 작용했던 것도 우연일 리 없다.

악의 제국 무너뜨리려고 레이건은 바오로 2세 교황을 친구이자 동맹으로 삼았다

레이건은 지략(智略)도 좋았다. 악의 제국 공산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 바티칸을 미국의 동맹국으로 포함시켰고, 백악관과 바티칸은 공산권에 대한 고급정보를 공유했다. 둘은 재임 중 열다섯 번이나 비밀회동을 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마가릿 대처 영국 수상과 함께 '레이건의 파트너'로 역사에 기록되는 것도 당연한데, 이번 한국을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은 훗날 어떻게 평가될까?

교황이 스스로 결정한 첫 해외순방이 한국 땅이라는데, 이렇게 떨떠름하고 당혹스러운 분위기가 조성될 줄은 가늠 못했다. 세월호 사고 한 달 전인 3월 중순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이 그의 방한 일정을 발표했을 때만해도 어수선한 한국사회가 모처럼 하나 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관측됐다. 하지만 교황이 떠난 지금 뒷맛이 개운하기는커녕 전보다 뭔가가 더 헝클어진 느낌이며, 우파 인사 상당수는 노골적으로 언짢아한다.

결정적으로 교황의 역사적 균형감각이 문제였다. 방한 일정을 마무리하는 18일 명동성당 미사에서 한민족의 화해와 용서를 강조한 것까지는 양해를 해준다 해도 그 이전에 북한이 코앞인 임진각을 최소한 한 번 이상을 찾았어야 옳았다. 그곳에서 지구상 최악인 북한 인권과 종교의 부자유를 언급하고, 북한 핵무기의 위험을 경고했어야 옳았다.

바로 그게 평양의 지하종교 신앙을 가진 이를 포함한 2000만 명 북한동포를 위로하는 길이고, 독재자에 대한 도덕적 압박이다. 임진각을 찾기 전 교황과 바티칸 관계자들이 지난 2월 유엔 북한인권조사위(COI)의 보고서 정도를 꼼꼼히 읽는 것도 기본이었으리라. 당시 보고서에는 김정은이 심각한 반(反)인도적 범죄와 국제법상 대량학살(genocide)을 자행했기 때문에 국제사회가 국제형사재판소에 회부해야 한다는 걸 명시하고 있다.

좋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오로 2세 교황처럼 세계사를 움직일 전략이 크게 부족하더라도 분단국가 한국에 대한 공부를 더 했어야 옳았다. 이를테면 그가 아시아청년대회에서 "잠들어있는 사람은 기뻐하거나 춤추거나 환호할 수 없습니다. 젊은이여 깨어있으라."고 당부한 것은 못내 공허했다. 세계사 앞에 정작 잠들어있는 건 한국가톨릭의 좌편향 사제들과, 그들에게 올바른 사목(司牧)의 지침을 내리지 못하는 바티칸 당국 자신이 아닐까?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에 앞서 오픈카를 타고 이동하며 신도와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좌편향 사제에게 따끔한 사목(司牧)지침을 못 내리는 바티칸 당국

상황이 만만해 보이니까 통진당 이석기의 가족들이 평화주의자로 위장해 '교황 마케팅'을 펼치는 것이고, 이석기도 며칠 전 최후진술서에서 "교황님께 감사 드린다"고 했다. 정의와 평화가 이토록 뒤바뀐 사례도 일찍이 없었다. 역겨운 건 세월호 유가족도 마찬가지이고, 그런 걸 동화(童話) 같은 기사로 포장해 "비바! 파파"를 외치기에 바쁜 이 땅의 신문 방송 앞에는 손발이 다 오글거린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교황은 "경제적 살인을 하지 말라", "고삐 풀린 시장경제는 새로운 형태의 독재이다"라는 강론을 연속으로 했는데, 그게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라는 이 나라의 헌법적 가치를 헷갈리게 만든다. 지금 이 땅의 못난 좌파매체들은 교황도 자기네 편이라며 떼를 쓴다. 무엇이 문제인가? 왜 이런 외교 실패를 낳았을까? 우선 교황의 지적 도덕적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포퓰리즘과 디폴트(채무불이행)로 악명 높은 아르헨티나에서 성장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강론에서 유사(類似) 해방신학의 분위기를 읽어내고 있다. 한국 가톨릭 사제들이 그걸 애써 휴머니즘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교황의 성향이 그런 쪽이라는 건 비밀이 아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교황의 방한에 따른 그런 부작용을 예측 못했을까? 그래서 문제다.

책임의 상당 대목은 염수정 추기경을 포함한 한국 가톨릭의 어수선한 집안 사정, 교황방한위원장으로 활동한 강우일 주교의 어정쩡한 정치성향 탓이다. 보다 큰 큰 책임은 시야 좁고 지모(智謀)가 모자란 박근혜 정부가 져야 한다. 교황은 박근혜 대통령의 거듭된 요청으로 한국을 해외순방지로 잡았다. 그 전에 우리 정부가 교황의 성향을 정교하게 파악할 순 없었을까? 교황의 성향이 요지부동이라고 판단했다면 초청 자체를 자제했어야 옳았다.

또 교황이 종교지도자이자 국가수반이라는 두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일정과 동선(動線)에 대해 조율할 것은 섬세하게 조율했어야 했다. 적극적 개입이 어렵더라도 예민한 분쟁의 소지가 있거나 아니면 내정간섭의 여지가 있는 사안인 제주도 해군기지 강정마을, 밀양 송전탑, 세월호 유가족과의 접촉 등은 피하도록 유도하는 게 상식이었다. 즉 교황이 무조건적 관용과 포용의 제스처를 취하는 것은 막았어야 했다.

북한 붕괴를 압박하고, 한국사회의 가치를 확인할 황금의 찬스

사실 이번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은 북한 붕괴를 압박하며, 한국사회의 가치를 재확인할 수 있는 황금의 찬스였다. 최선의 경우 요한 바오로 2세와 레이건의 폴란드 프로젝트처럼 프란치스코 교황과 박근혜 대통령이 움직였다면 한반도 역사를 바꿀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가 너무 허무하고, 뒷맛이 안 좋다. 긴 시선으로 볼 때 이번 교황 초청이 한국 가톨릭의 성장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게 필자의 개인적 견해다.

기회에 대통령의 성향도 짚어야 한다. 박 대통령 자체가 본래 종교 영성(靈性)에 관심이 많은데, 그게 이번 교황 초청과 무관치 않다. 공식적으로 박 대통령은 종교 없음 즉 무교(無敎)이지만 친 불교 성향으로 한때 대자행이라는 법명을 받은 적 있다. 젊었을 적엔 가톨릭에 입문해 율리아나라는 세례명을 가졌다. 종교에 두루 열려있는 그는 종교적 인간 즉 호모 릴리글로수스(Homo religlosus)가 분명하다.

그게 대통령에게 특유의 소명의식을 불어넣어주는 건 사실이겠지만, 현실과 역사에 대한 이해의 폭이 충분하고 너끈하다고 보긴 어렵다. 그런 개인적 한계에다 세상이 다 아는 이 정부 특유의 미숙함 혹은 어설픔까지 겹치고 꼬여 '당혹스러운 결과를 빚은 교황 방한'으로 나타난 셈이다. 안타깝다. 그런데 한국사회가 이렇게 헛발질이나 반복할 시간이 있긴 있을까?

글/조우석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