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은 GPT가"…생각마저 외주 준 2030 [Now 2.30]
입력 2026.08.21 07:00
수정 2026.08.21 07:00
과제·연애까지 AI에 맡기는 '생각 대행' 만연
기준 없이 AI 접한 세대일수록 '무비판 수용'
"AI 답이 참고자료 아닌 '생각의 기본값' 돼"
해당 이미지는 AI로 제작됨.
#40대 직장인 김모 씨는 당황했다. 새로 들어온 대학생 인턴에게 200페이지 분량의 리서치 자료 묶음을 한 페이지로 요약하라고 지시한 게 30분 전이었다. 인턴이 제출한 보고서는 짧은 시간에 준비된 것치고는 그럴싸했다. 궁금증에 보고서 내용을 몇 가지 묻자 돌아온 건 묵묵부답이었다. 자기가 요약한 내용조차 알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생성형 인공지능(AI)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김씨의 당혹감은 더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2030세대에게 AI 서비스는 이미 일상의 '기본값'이다. 오픈AI의 샘 올트먼 최고경영자(CEO)는 세쿼이아캐피털이 주최한 'AI 어센트' 행사에서 "나이 많은 이용자는 챗GPT를 검색엔진 대체재로, 20·30대는 '인생의 조언자'처럼, 대학생은 운영체제(OS)처럼 쓴다"고 말했다.
AI 서비스의 쓰임새도 점차 넓어지고 있다. 중독포럼과 가톨릭대 조선진 교수 연구팀 조사에 따르면 AI 서비스 활용 방안은 정보 검색(85.4%)과 업무 및 과제 처리(56.8%)를 넘어섰다. 무엇을 고를지 정하는 의사결정 보조(18.6%), 고민 상담 같은 정서적 활용(9.4%)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이런 흐름은 젊은 세대일수록 뚜렷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25 언론수용자 조사'에 따르면 성인의 생성형 AI 주간 이용률은 연령이 낮을수록 높았다. 20대(50.7%)는 답변자 2명 중 1명이 최근 일주일 안에 AI 서비스를 활용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후 30대(38.5%)와 40대(25.4%)가 뒤를 이었다. 이용 빈도도 20대가 주 평균 1.6일로 가장 잦았다.
해당 이미지는 AI로 제작됨.
연애 상담도, 여행 계획도 AI에게
일종의 '생각 대행'은 이미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다. 사회초년생 박 모(29) 씨는 연애와 교우 관계 상담을 생성형 AI 서비스 제미나이와 함께한다. 박 씨는 "이제는 연인과 싸웠을 때 어떻게 답장하면 좋을지 AI에게 묻는다"며 "친구에게 상담하기엔 시간을 빼앗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실제로 도움이 되지 않을 때도 있지만, 감정적 지지를 받을 수 있어 마음이 나아진다"고 덧붙였다.
직장인 윤 모(37) 씨는 올해 여름 휴가 계획을 챗GPT와 만들었다. 윤 씨는 "검색 포털은 광고가 많아서 카페나 음식점을 찾을 때 오히려 번거롭다"며 "여행지 추천부터 음식점 등 일정 배치, 항공권 비교, 예상 경비까지 모두 AI 서비스로 찾았다"고 말했다. 이어 "예전에는 계획을 짤 때 일행과 싸우기도 부지기수였는데, 이제는 조건만 입력하면 간편하게 일정을 짤 수 있어 좋다"고 설명했다.
실무 영역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모(33) 씨는 직장에서 AI 활용을 권장받아 코딩까지 새로 배웠다. 이 씨는 "예전에는 물류를 하나하나 전산에 입력해 물량을 파악하느라 고생이었다"며 "이제는 '바이브 코딩'으로 작동하는 AI 물류 데이터 정돈 서비스를 하나 만든 뒤에 활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생각 대행의 확산이 빠른 데는 이유가 있다. 감정 대행이나 체력 대행에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든다. 생각 대행은 다르다. 스마트폰과 컴퓨터만 있으면 사실상 무료로 이용 가능하다. 아이지에이웍스 모바일인덱스에 따르면 지난달 국내 챗GPT 모바일 앱 이용자는 1600만명을 넘어섰다.
성균관대 인공지능융합학과 이창준·이대호 교수 연구팀이 대학생 88명을 대상으로 학습 단계별 챗GPT(GPT-4o) 활용 효과를 추적한 결과 평소 AI 의존도가 높은 학생일수록 시험 성적이 떨어진다는 결과가 나왔다. ⓒ성균관대
AI가 '생각의 기본값'이 된 세대
당사자들은 일련의 현상을 위탁이나 회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계산기가 암산을, 핸드폰이 전화번호 암기를 대신했던 것과 같은 세대 교체로 여긴다. 앞선 도구를 쓰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불안도 깔려 있다.
프로그램 개발자 김 모(35) 씨는 "원래 개발 분야는 한 달이 1년처럼 느껴질 만큼 변화가 빠른데, 생성형 AI 등장 이후로는 예측조차 안 돼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예전엔 AI가 그럴듯하게만 코드를 짜 실제로 못 쓰는 경우도 많았지만 이제는 다르다"고 말했다. 이어 "다른 동료들이 쓰니 쓰지 않을 수도 없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AI 서비스는 특정 기능이 아닌 사고 자체를 대체한다는 점에서 앞선 사례와 다르다. 우려는 실측으로도 확인된다. 성균관대 인공지능융합학과 이창준·이대호 교수 연구팀이 대학생 88명을 대상으로 학습 단계별 챗GPT(GPT-4o) 활용 효과를 추적한 결과 평소 AI 의존도가 높은 학생일수록 시험 성적이 떨어진다는 결과가 나왔다. AI가 주는 답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고민하는 과정을 건너뛴 탓이다.
편리함의 이면은 어린 세대에서 더 뚜렷하다. 1020대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강사 송 모(32) 씨는 "AI 사용을 막을 수 없다면 잘 쓰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적어도 자기 주장을 먼저 세운 뒤 AI에 검증받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AI가 완성본을 내놓기만 바라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판단 기준이 자리 잡기 전에 AI를 접한 세대일수록 타격이 크다는 설명이다. 윗세대는 오랜 시간 스스로 자료를 찾고 실패를 거듭하며 자기 기준을 세운 세대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시행착오를 겪기 전에 답을 먼저 얻는 일이 익숙해진 만큼, 명확한 기준 없이 정답을 수용할 확률이 높다.
'무비판 수용'에 교육 현장도 고민
이러한 우려는 교육 현장에서도 감지된다. 교육부와 시도교육청은 올해부터 '수행평가 시 AI 활용 관리 방안'을 적용하고 있다. 교사가 수행 평가 결과물의 점수를 매기기 전에 학생과 함께 내용을 검증하는 과정을 거치게 하면서다. 학생이 AI 서비스로 만들어낸 결과물에 대해 설명하지 못하면 평가에 불이익을 주는 방식이다.
전문가도 AI 서비스 활용에 있어 같은 지점을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고외주'의 저자인 홍진기 연세대 화공생명공학과 교수는 "경험이 어느 정도 축적된 사람은 AI의 답을 자기 기준과 부딪쳐 볼 수 있다"며 "반면 아직 기준이 형성되지 않은 사람은 AI의 답을 자기 생각의 자리에 그대로 넣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홍 교수는 "당장 바꿀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습관은 AI를 열기 전에 자기 흔적을 먼저 남기는 것"이라며 "과제를 시작하기 전에 내가 아는 것을 활용해 가설을 만들고, 무엇이 이해되지 않는지 스스로 질문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AI의 답을 곧바로 완성품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반드시 자기 언어로 다시 설명해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