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병구가 만들어지기 전에 [기자수첩-문화]
입력 2026.07.20 08:31
수정 2026.07.20 08:36
‘지구를 지켜라!’가 남긴 경고…이해는 정당화가 아니라 파국을 막는 첫 단계
2003년 개봉한 장준환 감독의 영화 ‘지구를 지켜라!’는 개봉 당시 시대를 앞서간 ‘비운의 괴작’으로 불렸다. 흥행은 실패했지만 23년 동안 씨네필들의 지지를 받으며 꾸준히 회자됐고 이제는 젊은 세대까지 새롭게 발견하는 작품이 됐다.
지난 10일 제30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 개봉관 중 하나인 부천 CGV 소풍에서 ‘지구를 지켜라!’를 보러 극장을 채운 관객들도 병구(신하균 분)가 웃음을 주다가 어느 순간 가슴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함께 따라갔다.
‘지구를 지켜라!’ 포스터 ⓒ넷플릭스
병구는 유제화학 사장 강만식(백윤식 분)이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믿고 그를 납치한다. 외계인의 음모로부터 지구를 지켜야 한다며 고문도 서슴지 않는다. 그가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고 그의 폭력은 분명 잘못됐다.
하지만 영화가 병구에게 닥친 탄광 사고와 노사 문제, 민주화운동 과정의 충돌을 하나씩 꺼내놓으면서 감정은 달라진다. 병구는 사회 곳곳에서 일어난 폭력과 불합리를 온몸으로 겪은 인물이다. 주변 사람들을 잃고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한 채 홀로 남아 정신이 무너졌다. 20대 시절 신하균의 앳된 얼굴과 순수함, 냉기, 슬픔을 오가는 연기도 병구의 광기 뒤에 가려진 상처를 들여다보게 한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 가지 생각이 남았다. 두 시간 동안 병구가 살아온 시간을 지켜본 관객들은 그에게 측은지심을 느낀다. 그러나 극장 밖에서 외계인의 침공을 외치며 이상 행동을 하는 ‘진짜 병구’를 만난다면 반응은 달라질 수 있다. 그의 지난 삶을 궁금해하기보다 위험한 사람이나 미치광이로 여기며 피할 가능성이 크다.
영화를 만든 장준환 감독과 인터뷰에서, 장 감독에게 이 생각을 그대로 전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병구를 안타깝게 여기지만 현실에서도 같은 시선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었다.
장 감독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병구 같은 사람들을 이 사회에서 만들어내면 현실에서도 아마 그 한 사람 때문에 지구가 파괴될지도 모른다”며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가 큰 나락으로 빠지지 않게 손을 잡아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냥 시선이라도 줘야 우리가 덜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답했다.
이 말은 병구의 폭력을 용서하거나 위험한 행동을 내버려둬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무너진 뒤 격리하고 처벌하는 것보다 그 전에 무엇이 그를 밀어내고 있는지 살피는 일이 사회를 더 안전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현실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전체 삶보다 가장 불편한 장면을 먼저 만난다.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혼잣말하는 사람이나 거리에서 잠든 노숙자를 보면 본능적으로 거리를 둔다. 각자의 안전을 위해 조심하는 행동까지 비난할 수는 없다. 개인에게 모든 사정을 알아보고 직접 손을 내밀라고 요구할 수도 없다.
문제는 사회의 대응마저 개인의 회피와 같은 지점에서 끝날 때다. 한 사람이 가족과 일터, 지역사회에서 밀려나는 동안에는 보이지 않다가 사건이 벌어진 뒤에야 관심이 집중된다. 그때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보다 어떻게 통제하고 처벌할지가 먼저 논의된다. 병구를 만든 환경은 남겨둔 채 병구의 광기만 제거하려는 방식이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가 2일 서울지하철 1호선 시청역에서 열차에 탑승하고 있다. ⓒ데일리안 진현우 기자
최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22년 만에 출근길 버스 탑승 정기 시위를 재개하고 지하철 시위도 이어가면서 시민 불편이 다시 발생했다. 교통 흐름을 막거나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행위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 출근길에 피해를 본 시민의 일상도 가볍게 다룰 수 없다.
그럼에도 비판이 ‘민폐 집단’이라는 한마디로 끝나면 이들이 저상버스 도입과 장애인 권리 예산을 오랫동안 요구해온 배경도 함께 사라진다. 시위 방식의 적절성을 따지는 일과 요구가 제기된 이유까지 지우는 일은 구분돼야 한다. 질서를 지키면서도 그들이 왜 거리와 지하철에 나왔는지 살펴보는 일은 동시에 가능하다.
전장연과 병구를 같은 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 다만 불편한 행동은 크게 보이지만 그 행동에 이르기까지 쌓인 시간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같은 질문이 남는다. 병구의 납치와 고문이 잘못됐다고 판단하면서도 그가 왜 무너졌는지 이해할 수 있듯 맥락을 살피는 일은 행동에 면죄부를 주는 것과 다르다.
취재 일정이 촉박한 날 지하철이 멈추면 나 역시 시위의 이유보다 지연 시간부터 확인할 것이다. 거리에서 예측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는 사람과 마주치면 일단 피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이 문제를 개인의 냉정함이나 시민의 도덕성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 위험한 상황은 제지하되 한 사람이 고립의 끝까지 밀려나지 않도록 연결하는 공공의 역할이 함께 필요하다.
영화는 기이한 행동 뒤에 놓인 상실을 보여주고 ‘미치광이’라는 이름으로 묶였던 사람을 다시 한 명의 인간으로 바라보게 한다. ‘지구를 지켜라!’가 23년이 지나서도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도 병구를 광인이나 폭력범으로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해가 곧 용서는 아니다. 잘못에 책임을 묻는 일과 그 잘못을 만들어낸 조건을 살피는 일도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원인을 보지 않고 결과만 처벌하면 또 다른 병구가 같은 자리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
장 감독의 말처럼 누군가 거대한 나락에 빠지기 전에 필요한 것은 거창한 구원이 아닐 수 있다. 한 번 더 바라보고 이야기를 들은 뒤 필요한 도움과 연결하는 일에서 시작할 수 있다. 영화 속 병구에게 느낀 측은지심이 엔딩 크레딧과 함께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영화 밖에서 지구를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