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보다 무서운 출구 없는 미로…'백룸'과 '8번출구'가 포착한 현대인의 불안 [기자수첩-연예]
입력 2026.06.25 07:00
수정 2026.06.25 07:00
끝없이 이어지는 지하 통로에 투영된 현대인의 삶
잔인한 연쇄살인마도, 귀신도 없다.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지하철 통로와 노란 벽지, 낡은 카펫, 형광등이 무한히 반복되는 공간만 존재한다. 지난해 국내에서 45만 관객을 동원한 '8번출구'와 최근 110만 관객을 돌파한 '백룸'은 모두 리미널 스페이스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미디어캐슬·바이포엠스튜디오ⓒ'8번 출구'·'백룸' 포스터
리미널 스페이스란 텅 빈 복도, 불 꺼진 수영장, 영업이 끝난 쇼핑몰처럼 익숙하지만 어딘가 낯선 공간을 의미한다. 기능은 남아 있지만 목적은 사라진 장소, 사람들이 있어야 하지만 아무도 없는 공간이다. '8번출구'의 끝없이 반복되는 지하철 통로와 '백룸'의 노란 벽지와 형광등이 이어지는 사각형의 공간은 이러한 리미널 스페이스를 적극 활용했다.
'8번출구'와 '백룸' 속 인물들은 끊임없이 길을 잃는다. 출구를 찾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지만 같은 공간이 반복되고, 규칙을 발견해도 그것이 정답이라는 보장은 없다. 흥미로운 점은 두 작품이 탈출 자체보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선택과 행동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같은 미로에 갇혀 있어도 누군가는 규칙을 믿고, 누군가는 의심하며, 누군가는 포기한다.
이러한 서사가 관객의 공감을 얻는 이유는 단순한 공간 공포에만 있지 않다. 두 작품이 그려내는 끝없는 통로와 반복되는 루프는 오늘날 많은 이들이 체감하는 불확실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취업과 주거, 관계와 미래까지 어느 것 하나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시대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받지만 그 선택이 정답인지 확신할 수 없다.
실제로 '백룸'을 연출한 케인 파슨스는 이 세계를 산업화된 사회가 만들어낸 고립감과 단절의 은유라고 설명했다. 이에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반복되는 구조와 출구를 찾을 수 없는 환경은 알고리즘과 AI가 지배하는 디지털 시대의 비인간적 질서를 떠올리게 한다.
특히 '백룸'의 공간은 인간의 온기나 의지가 전혀 개입할 수 없는 미로라는 점에서, 주체성을 잃고 거대한 사회적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인간의 무력감을 극대화한다. 출구를 찾으려는 시도조차 무의미하게 만드는 이 미로는, 데이터 조각처럼 표류하며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현대 사회의 소외감을 드러낸다.
미디어캐슬·바이포엠스튜디오ⓒ'8번 출구'·'백룸' 스틸컷
한편 '8번출구'는 취업과 노동, 사회적 규범, 관계 맺기에 대한 부담 등 보다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불안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반복되는 출근과 일상,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 속에서 무감각해진 현대인의 삶이 끝없이 이어지는 지하 통로에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젊은 세대가 마주한 불안과 불완전한 미래에 대한 고민과도 맞닿아 있다.
나아가 타인과의 관계를 회피한 채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미래를 향해 습관적으로 발을 내딛는 삶에 대한 경고도 잊지 않았다. 매일 스쳐 지나가지만 서로에게 무관심한 타인들을 NPC처럼 소비하면서, 정작 자신 역시 감정적으로 마비되어 가는 현대인의 단면을 서늘하게 비춘다.
물론 두 작품이 품고 있는 불안의 결이 같지는 않다. 앞서 언급했듯 '백룸'이 디지털 시대의 소외와 단절, 알고리즘적 반복을 이야기한다면 '8번출구'는 노동과 관계, 정체성에 대한 보다 현실적인 압박을 비춘다. 그러나 두 작품은 결국 하나의 지점에서 만난다. 바로 불확실성이다.
기존의 많은 공포영화는 위협의 실체를 드러내고, 그것을 피하거나 제거하며 서사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8번출구'와 '백룸'은 위협이 무엇인지조차 끝내 명확히 하지 않는다. 출구가 존재하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고, 결국 탈출하지 못한 채 같은 공간을 맴도는 감각만 남는다. 관객은 끝내 모든 설명을 듣지 못한 채 극장을 나서게 된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날 관객들이 가장 익숙하게 느끼는 공포의 실체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알 수 없고,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그리고 어쩌면 이 거대한 삶의 미로에는, 애초에 정답이라는 출구 따위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