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개경 승도들의 반란 – 승려들의 두 번째 반란 [정명섭의 실패한 쿠테타 역사㊳]
입력 2026.06.23 14:01
수정 2026.06.23 14:01
1217년의 고려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몽골 초원의 여러 부족들이 칭기즈칸에 의해 통합되면서 강력한 세력을 떨쳤다. 이들은 자신을 탄압한 금나라에 대한 복수를 천명하면서 전면적인 침략을 단행했따. 그 와중에 금나라에게 멸망한 요나라의 후손인 거란족들이 요동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켜서 몽골에 호응했다. 이들이 세운 나라를 동쪽의 요나라라는 뜻으로 동요라고 불렀다. 하지만 동요 내부에서 동요가 생겨났다. 몽골의 간섭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 생긴 것이다. 이들에 의해 몽골에 충성을 맹세한 동요의 지배층이 쫓겨난다. 이 사태를 지켜보던 몽골은 자신을 배신한 동요를 공격한다.
삽시간에 밀려닌 동요의 거란족들은 살아남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넘어온다. 이때가 1216년 8월이었다. 고려의 북쪽지방은 삽시간에 약탈을 당했는데 고려의 국방력이 무신 정권기를 거치면서 많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실권자인 최충헌이 자신의 안위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중앙군을 지방으로 파견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대로 지켜볼 수만은 없는 상황이라 김취려를 지휘관으로 하는 고려군이 반격을 감행하면서 거란족들을 물리친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사용한 환두대도 유물ⓒ필자 촬영
하지만 돌아갈 수 없는 거란족들 역시 물러나지 않았다. 전열을 정비한 그들은 10월에 다시 남하를 시작해서 지금의 평양인 서경을 공격하고 개경 근처까지 진군한다. 이에 개경 주민들은 공포에 떨었고, 최충헌을 원망했다. 사실 도망치는 거란군을 초기에 격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최충헌은 승리한 장군들이 전공을 앞세워서 인심을 얻고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병사들을 모아서 군사훈련을 하는 퍼포먼스를 보이기는 했지만 문객들 중에 나가서 싸우겠다는 자가 있으면 먼 곳으로 유배를 보냈다. 개경 근처에 거란족들이 나타나자 비로소 대규모 군대를 편성하면서 개경 근처 사찰의 승려들도 대규모로 동원한다. 고려에서 승려들은 단순히 불공을 드리고 참선하는 존재가 아니라 전투가 벌어지면 군대에 종군해서 싸우기도 했다. 거기다 사찰별로 모여있으니까 징집하고 편성하기도 쉬웠다. 하지만 승려들은 고려가 아닌 최충헌을 위한 싸움에 동원되어서 죽기 싫었다. 거기다 무신들이 집권한 이후, 왕실의 후원을 받던 개경과 근처의 사찰들은 기득권을 잃은 상태였다.
고종 4년인 서기 1217년 2월 새벽, 개경의 서문인 선인문 앞에 한 무리의 승려들이 몰려와서 거란군이 쳐들어왔으니 어서 성문을 열어달라고 외쳤다. 사실, 몰려온 승려들은 개경과 근처의 사찰인 흥원사와 홍원사, 경복사와 왕륜사, 안양사와 수리사에 속한 승려들로 최충헌을 죽이기 위해서 가짜로 패잔병 흉내를 낸 것이다. 사극에서는 보통 이럴 때 문을 열어줬다가 기습을 당하는데 이때는 선인문을 지키던 경비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속임수가 통하지 않자 승려들은 무기를 꺼내들고 성문을 부순 다음 경비병들을 해치웠다. 그리고 낭장 김덕명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그가 최충헌의 명령으로 승려들을 차출하고 재산을 빼앗는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집을 부수느라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 최충헌 휘하의 사병들이 반격을 시작했다. 쫓기던 승려들은 반격을 시도했지만 300여명이라는 인명피해를 내고 우두머리가 화살에 맞아 쓰러지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쳐들어온 선인문으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문이 잠겨있어서 뿔뿔이 흩어지면서 최충헌의 제거는 실패로 돌아갔다, 반란의 실패가 참혹한 처형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고려사 반역 열전에 실린 최충헌의 기록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승려 3백여 명을 남계천(南溪川) 가에서 참수하니 그 전후로 참수당한 승려들이 거의 8백여 명이나 되어 산처럼 쌓인 시체 때문에 사람들이 몇 달 동안이나 지나다니지 못했다.
날이 밝자 최충헌은 도성을 대대적으로 수색해서 도망치지 못하고 잡힌 300여명의 승려를 남계천에서 목을 베었다. 이후로도 가담자들을 찾아서 목을 베었는데 모두 8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담자들을 체포해서 고문하는 와중에 가담자 중 한명으로 중군원수 정숙첨의 이름이 나온다. 그는 다름 아닌 최충헌의 사돈이며 거란군을 막을 고려군의 지휘관이었다. 아마 사돈이 아니었다면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보통은 외부의 침략이 발생하면 내분이 중단되고 일치단결해서 적을 물리친다. 내부의 적이 아무리 무섭고 밉다고 한들 외부의 침략자들이 더 위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란족의 침입 당시 고려에서는 여러 차례의 반란이 일어난다. 고구려의 부흥을 주장하며 서경에서 봉기한 최광수는 물론이고, 이장대의 반란이 뒤를 잇는다. 정확하게는 고려가 아니라 최충헌에 대한 불만으로 외부의 침략으로 백성들이 고통받는 와중에도 자신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하는 모습 때문이었다. 그리고 최충헌은 아마 승려들의 목을 치면서 자신의 철저한 대비가 효과를 발휘했다고 기뻐했을 것이다. 얼마 후, 승려들이 돌파한 선인문 근처에 거란족들이 나타나서 성문 밖에 있는 황교를 불태우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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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섭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