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수 코인 맡길 곳 찾는다더니…현실 외면한 조건 논란
입력 2026.06.20 07:39
수정 2026.06.20 07:39
24시간 대응·전액 배상 요구에 업계 "현실성 부족"
보안 강화 취지에도 "오히려 보안 취약성 키울 수도"
경찰청이 압수 가상자산 관리 사업에 24시간 대응·100% 배상 등 고강도 조건을 내걸자 커스터디 업계에서는 현실성이 떨어질 뿐 아니라 오히려 대형 거래소에 유리한 구조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해당 이미지는 AI로 제작됨.
경찰청이 압수 가상자산 보관·관리 사업자 선정에 나섰지만 업계에서는 사업 조건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압수 자산을 100% 콜드월렛에 보관하면서도 24시간 대응 체계를 유지해야 하고 자산 손실 발생 시 전액 배상 책임까지 요구하면서다.
특히 보안을 강화하겠다는 취지와 달리 상시 대응 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보안 취약성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20일 가상자산업계에 따르면 경찰청은 오는 24일까지 '압수 가상자산 보관·관리 사업' 입찰을 진행한다.
사업 기간은 계약 후 1년이며 예산은 2억6700만원이다.
사업자는 압수 가상자산을 전량 콜드월렛에 보관해야 하며 수사관 요청 시 지갑 생성과 자산 전송 확인 등 지원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
또 보관 중 자산 손실이 발생할 경우 100% 보상 책임을 져야 한다. 공동수급체 구성도 허용된다.
업계에서는 경찰청이 제시한 운영 조건이 지나치게 까다롭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실제 경찰청은 지난해 세 차례 관련 입찰을 진행했지만 최종 사업자를 선정하지 못했다.
업계에 따르면 초기 입찰 당시에는 사업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 업체들이 많아 참여가 저조했고, 이후에는 평가 기준과 운영 부담이 영향을 미쳤다.
특히 세 번째 입찰에서는 복수 업체가 참여했지만 평가 점수를 충족하지 못해 유찰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입찰 조건에서 업계가 가장 부담으로 꼽는 부분은 24시간 대응 의무다.
커스터디 업체들은 일반적으로 콜드월렛 접근 권한을 극소수 인원에게만 부여하고 다단계 승인 절차를 통해 자산을 관리한다. 보안을 위해 권한자를 최소화하는 구조다.
하지만 경찰청 요구대로 수사기관 요청에 따라 언제든 지갑 생성이나 자산 이동을 지원하려면 상시 대응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특히 콜드월렛에서 자산을 이동하려면 다수 인원의 승인 절차가 필요한 만큼 야간과 휴일을 포함한 교대 인력 운영이 불가피하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오히려 보안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는 점이다.
업계에 따르면 일부 커스터디 업체는 자산 이동 시 임원과 직원 등 최소 4~5명이 동시에 승인해야 하는 구조다.
이를 24시간 체계로 확대할 경우 권한을 가진 인원이 대폭 늘어나게 되는데, 이는 접근 권한을 최소화해 보안을 강화한다는 기존 운영 원칙과 충돌한다는 지적이다.
한 커스터디 업계 관계자는 "콜드월렛은 원칙적으로 소수 인원만 접근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데 24시간 대응을 위해 권한자를 늘리면 내부 통제 측면에서 새로운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며 "보안을 강화하려는 요구가 오히려 보안 취약성을 높일 수 있는 구조"라고 말했다.
100% 배상 조항 역시 부담 요인으로 꼽힌다.
업계에서는 경찰청 요구를 충족하려면 대규모 보험 가입이나 충분한 현금성 자산 확보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보험료 부담이 적지 않은 데다 향후 압수 자산 규모가 커질 경우 사실상 상당한 수준의 자본력을 요구받게 된다는 것이다.
일부 업계에서는 관련 요구사항을 두고 압수 자산을 우선적으로 복구·배상해야 하는 취지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점도 부담으로 꼽고 있다.
또 다른 커스터디 업계 관계자는 "일부 조항은 경찰청 자산을 최우선으로 복구·배상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며 "민간 사업자 입장에서는 다른 고객 자산과의 형평성 문제도 고려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법인 가상자산 거래가 장기간 제한되면서 국내 커스터디 시장이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점도 부담 요인으로 꼽힌다.
전문 수탁업체 상당수가 제한된 시장 환경 속에서 사업을 영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비용·고위험 공공사업까지 수행해야 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는 지적이다.
이에 일각에서는 현재 입찰 구조가 사실상 대형 거래소에 유리하게 설계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입찰 자격이 가상자산사업자(VASP) 전반에 열려 있어 전문 수탁업체뿐 아니라 거래소도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이번 입찰에는 ▲한국디지털에셋(KODA) ▲한국디지털자산수탁(KDAC) ▲비댁스(BDACS) ▲헥토월렛원 ▲인피닛블록 등 커스터디 업체와 함께 두나무도 참여를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경찰청이 요구한 24시간 대응 체계와 전액 배상 능력을 고려하면 상대적으로 자본력과 인력을 갖춘 대형 거래소가 유리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다만 이는 정부가 추진 중인 제도 개편 방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 국회에서 논의 중인 디지털자산기본법에는 거래소와 수탁업을 분리하는 내용이 담길 것으로 알려졌다.
법안이 시행되면 거래소는 매매·중개 업무를, 전문 수탁사는 보관 업무를 담당하게 된다.
이에 업계에서는 향후 업권 분리가 현실화될 경우 현재 거래소가 사업자로 선정되더라도 다시 전문 수탁업체를 선정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압수 가상자산을 안전하게 관리하겠다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현재 조건은 공공이 부담해야 할 위험까지 민간 사업자에게 전가하는 수준"이라며 "24시간 대응과 100% 배상 의무를 동시에 요구하면서도 사업 예산은 제한적인 만큼 현실적인 사업 구조라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