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카카오톡
블로그
페이스북
X
주소복사

'트래블로', 기괴한 디스토피아의 악몽 [D:쇼트 시네마(161)]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6.06.17 08:43
수정 2026.06.17 08:43

이민배 감독 연출

OTT를 통해 상업영화 뿐 아니라 독립, 단편작들을 과거보다 수월하게 만날 수 있는 무대가 생겼습니다. 그중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부터 사회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메시지까지 짧고 굵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50분 이하의 영화들을 찾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지구가 하나의 연합체로 통합된 미래. 사람들은 가상공간 속 채널에 따라 계층이 나뉜 세상에서 살아간다. 직접 여행하기보다 타인의 경험을 소비하는 것이 일상이 된 시대, 트래블러 목희(하영주 분)는 의뢰인을 대신해 장소를 방문하고 그 과정을 스트리밍하는 일을 한다.


어느 날 목희는 출입이 제한된 4채널 구역의 한 집을 방문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평소와 다름없는 여행이라 생각했지만, 집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종교 공동체가 자리 잡고 있다. 기괴한 가면을 쓴 사람들, 노예처럼 살아가는 이들, 반복되는 의식과 알 수 없는 규율 속에서 목희는 점차 공동체의 실체를 마주하게 된다.


그들은 목희를 붙잡아 자신들의 일원으로 만들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환각과 세뇌, 감금 속에서도 저항을 이어가던 목희는 끝내 탈출을 시도한다. 자신을 억압하던 여성과 대립하고, 공동체를 이끌던 남성과도 충돌한다. 그 과정에서 목희는 그들이 말하는 신세계와 진리가 결국 또 다른 지배와 복종의 언어에 불과하다고 맞선다.


공동체는 무너지지만 해방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목희는 감금돼 있던 사람들을 풀어주고 밖으로 나오지만 자신 역시 여전히 어딘가에 갇혀 있다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다. 시간이 흐른 뒤 또 다른 트래블러 마리아가 같은 장소를 향하고, 그곳에는 여전히 인간쥐가 남아 있다. 끝난 줄 알았던 여행은 다시 시작된다.


이민배 감독의 '트래블로'는 SF 장르의 외형을 빌려왔지만, 이야기의 중심에는 미래 기술보다 인간에 대한 질문이 놓여 있다. 영화 속 가상채널은 단순한 네트워크가 아니라 계급과 통제의 상징이다. 사람들은 직접 세상을 경험하기보다 타인의 경험을 소비하고,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각자의 채널 안에 갇혀 살아간다.


영화가 가장 강렬하게 다가오는 지점은 특유의 비주얼이다. 축축한 공간과 녹색빛으로 물든 화면, 사람과 동물의 경계가 뒤섞인 존재들, 낡은 가면과 폐쇄된 공동체의 풍경은 마치 악몽을 들여다보는 듯한 감각을 만들어낸다. 설명보다는 이미지와 분위기를 통해 관객을 압도하는 방식이다.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학살과 폭력, 무너진 도시의 환영은 단순한 배경 설정을 넘어 인간 문명에 대한 감독의 시선을 드러낸다. 영화 속 광신도들이 꿈꾸는 신세계는 결국 또 다른 감옥에 불과하고, 목희가 탈출한 뒤에도 같은 이야기가 반복된다는 결말은 인간이 만들어온 지배와 복종의 구조가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 냉소로 읽힌다.


'트래블로'는 친절한 영화가 아니다. 세계관에 대한 설명도, 인물들의 행동에 대한 명확한 해답도 충분히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불쾌하고 기괴한 이미지들을 쌓아 올리며 하나의 거대한 악몽 같은 풍경을 완성한다. 독특한 세계관과 강렬한 비주얼이 쉽게 잊히지 않는다. 영화가 끝난 뒤 남는 것은 탈출의 안도감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역시 또 다른 채널은 아닌지 묻는 찜찜한 질문이다. 러닝타임 40분.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댓글 0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