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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칩 전력 병목 노린 삼성전기…MLCC에 '실리콘' 더했다

임채현 기자 (hyun0796@dailian.co.kr)
입력 2026.06.14 09:00
수정 2026.06.14 10:55

GPU·HBM 고집적화에 칩 가까운 전력 안정화 부품 수요 ↑

100㎛ 미만 초박형·낮은 ESL로 AI 서버 패키지 공략

MLCC·패키지 기판과 묶어 고객 맞춤형 솔루션 제공

삼성전기 실리콘 캐패시터.ⓒ임채현 기자

인공지능(AI) 반도체의 성능과 소비전력이 빠르게 높아지면서 삼성전기가 적층세라믹캐패시터(MLCC)에 실리콘 캐패시터를 더해 AI 서버용 부품 포트폴리오를 넓히고 있다. GPU와 고대역폭메모리(HBM) 가까이에서 순간적인 전력 변동과 노이즈를 잡는 부품 수요가 커지자, 기존 MLCC가 대응하기 어려운 초박형·고주파 영역을 실리콘 캐패시터로 채우겠다는 전략이다.


삼성전기는 11일 실리콘 캐패시터 기술 학습회를 열고 제품의 구조와 시장 공략 방향을 설명했다. 이날 발표는 삼성전기에서 실리콘 캐패시터 개발을 담당하는 김원기 그룹장이 맡았다.


김원기 삼성전기 실리콘 캐패시터 개발담당 그룹장이 11일 오전 서울 태평로빌딩에서 기술 관련 브리핑을 하는 모습.ⓒ삼성전기
AI칩 고집적화에 커지는 '전력 안정화' 수요

캐패시터는 전기를 저장했다가 반도체가 필요로 할 때 공급하고, 회로에서 발생하는 전기적 노이즈를 걸러주는 부품이다. 김 그룹장은 캐패시터의 역할을 아파트 옥상의 물탱크에 비유했다. 여러 가구가 동시에 물을 사용해도 물탱크가 수압을 일정하게 유지하듯, 캐패시터가 순간적으로 필요한 전력을 공급해 반도체가 안정적으로 작동하도록 돕는다는 설명이다.


김 그룹장은 "데이터센터에서 검색이나 질의 요청이 들어오면 각 부품이 순간적으로 많은 전력을 끌어다 쓰게 된다"며 "캐패시터는 전기 에너지를 부분마다 모아뒀다가 시간에 따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AI 서버에서는 이 기능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GPU와 HBM은 연산 요청이 몰리는 순간 전력 소비가 급격히 늘어난다. 이때 전압이 흔들리거나 회로 간 노이즈가 발생하면 연산 오류나 성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 AI 반도체의 연산 속도와 코어 수가 늘어날수록 필요한 위치에 전력을 빠르고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능력도 중요해지는 이유다.


GPU와 HBM의 집적도가 높아지면서 패키지 내부의 부품 배치 공간도 빠듯해지고 있다. 전력 손실과 노이즈를 줄이려면 캐패시터를 칩 가까이에 둬야 하지만, 기존 MLCC는 두께와 구조상 적용할 수 있는 위치에 한계가 있다. 삼성전기는 반도체 바로 아래나 패키지 기판 내부에 넣을 수 있는 초박형 실리콘 캐패시터로 이 영역을 공략하고 있다.


실리콘 캐패시터는 실리콘 웨이퍼에 미세한 구멍을 깊게 파 표면적을 넓힌 뒤 그 안에 유전체와 전극층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만든다. 세라믹 시트를 여러 겹 위로 쌓아 용량을 확보하는 MLCC와 달리, 캐패시터 구조를 실리콘 내부에 구현해 제품 두께를 줄이는 데 유리하다.


김 그룹장은 "반도체 공정이 잘하는 것은 미세한 구조를 만들고 박막을 얇게 형성하는 것"이라며 "실리콘에 구멍을 조밀하게 뚫어 표면적을 넓히고 그 안에 전극과 유전체를 형성해 작은 면적에서도 높은 용량을 구현한다"고 설명했다.


삼성전기 MLCC 제품. ⓒ임채현 기자
100㎛ 미만 초박형…MLCC 못 채우는 영역 공략


삼성전기에 따르면 현재 양산 제품의 실리콘 두께는 약 60마이크로미터(㎛) 수준이다. 접속 단자를 포함해도 전체 높이가 100㎛에 미치지 않는다. 이에 따라 반도체와 패키지 기판 사이인 '랜드사이드'나 반도체 옆면, 기판 내부 등 기존 MLCC를 배치하기 어려운 공간에도 적용할 수 있다.


전류의 흐름을 방해하는 기생 인덕턴스(ESL)가 낮은 것도 강점이다. MLCC는 내부 전극이 여러 층으로 쌓여 전류가 복수의 경로를 거치지만, 실리콘 캐패시터는 전류 이동 경로가 상대적으로 짧고 단순하다. 삼성전기는 실리콘 캐패시터의 ESL이 MLCC보다 100배 이상 낮아 전력 사용량이 빠르게 변하는 AI 가속기의 고주파 노이즈와 전력 공급 지연을 줄이는 데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전압과 온도 변화에 따른 용량 변화도 상대적으로 작다. AI 반도체는 작업량에 따라 전압과 소비전력을 수시로 조절한다. 이 과정에서 캐패시터 용량까지 달라지면 시스템 설계가 복잡해진다. 실리콘 캐패시터는 전압과 온도가 바뀌어도 용량이 비교적 일정하게 유지돼 AI 서버뿐 아니라 전장, 광통신, 위성, 의료·항공 장비 등으로 적용 범위를 넓힐 수 있다.


다만 실리콘 캐패시터가 MLCC를 대체하는 구조는 아니라고 회사 측은 강조했다. MLCC는 세라믹층을 높게 쌓을 수 있어 대용량·고전압 제품을 구현하기 쉽고 가격 경쟁력도 높은 반면 실리콘 캐패시터는 단위 용량당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싸지만, 두께 제약이 크고 빠른 전력 대응이 필요한 고성능 반도체 영역에서 강점을 갖는다는 것이다.


김 그룹장은 "MLCC가 필요한 영역이 있고, MLCC로는 시스템 설계가 어려운 영역을 실리콘 캐패시터가 보완한다"며 "기존 MLCC 시장을 잠식하는 것이 아니라 두 제품이 함께 캐패시터의 적용 범위를 넓히는 구조"라고 말했다.


사업 방식도 MLCC와 차이가 있다. MLCC가 정해진 규격과 성능 로드맵에 따라 제품을 대량 생산하는 사업이라면 실리콘 캐패시터는 고객사의 반도체 구조와 요구 용량, 두께, 단자 수에 맞춰 설계하는 맞춤형 사업에 가깝다. 고객사로부터 필요한 사양을 받은 뒤 파운드리와 협력해 웨이퍼를 설계·생산하고, 후공정과 개별 검사를 거쳐 납품한다.

'MLCC·패키지 기판'까지 묶는다

삼성전기는 반도체 공정 경험과 MLCC 기술을 함께 보유한 점을 경쟁력으로 내세우고 있다. D램 제조에 활용돼 온 ISC(Integrated Stack Capacitor) 공정을 실리콘 캐패시터에 응용해, 실리콘 웨이퍼를 깊게 파내고 그 안에 유전체와 전극을 형성했다. 작은 면적에서도 높은 전기 용량을 구현하기 위한 방식이다.


품질 검증 체계도 별도로 구축했다. 삼성전기는 기존 MLCC 품질보증 시스템을 바탕으로 웨이퍼 단위가 아닌 완성된 실리콘 캐패시터를 하나씩 검사할 수 있는 테스터 설비를 자체 개발했다. 고객 맞춤형 제품 비중이 높은 만큼 개별 제품의 성능과 신뢰성을 정밀하게 확인하기 위해서다.


패키지 기판 사업과의 결합도 차별화 요소다. 삼성전기는 MLCC와 실리콘 캐패시터, 반도체 패키지 기판을 모두 공급할 수 있다. 실리콘 캐패시터를 반도체 아래나 기판 내부에 배치하려면 부품의 두께와 단자 위치, 전력 경로를 기판 설계와 함께 맞춰야 한다. 삼성전기는 부품과 기판을 동시에 설계·제안해 고객사의 개발 기간을 줄이고 패키지 성능을 최적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 그룹장은 "캐패시터 부품과 실리콘 캐패시터, 패키지 기판을 모두 할 수 있는 회사는 삼성전기가 유일하다"며 "고객사 입장에서는 부품과 기판을 함께 조율할 수 있어 개발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실리콘 캐패시터 시장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에서 AI 서버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향후에는 전장과 광통신, 위성 등으로 적용처가 넓어질 전망이다. 삼성전기는 관련 시장이 2031년까지 연평균 18% 이상 성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글로벌 대형 기업과 체결한 약 1조5000억원 규모의 공급 계약은 이 같은 전략이 실제 수주로 이어진 사례다. 삼성전기는 2027년부터 2028년까지 2년간 실리콘 캐패시터를 공급할 예정이다.


삼성전기는 향후 고용량·다단자 제품군을 확대하고 고객사별 맞춤형 설계를 강화할 계획이다. MLCC가 맡아온 기존 시장을 대체하기보다 AI 반도체의 고집적화 과정에서 새롭게 생겨난 초박형·고주파 영역을 실리콘 캐패시터로 채우고, 이를 패키지 기판과 묶어 공급하는 것이 사업 확대의 핵심이다.

임채현 기자 (hyun0796@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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