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으로 사라진 공급망 질서, 후폭풍은 종전 후 몰아친다 [판 뒤집힌 물류망①]
입력 2026.06.09 06:00
수정 2026.06.09 06:00
100일 넘긴 미-이란 전쟁
기존 해상 물류망 사실상 붕괴
세계 주요국 新질서 재편 속도↑
공급망 다각화·해상실크로드 중요
호르무즈 해협에서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에 의해 피격된 태국 선박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다(기사 내용과 관계 없음). ⓒ AFP/연합뉴스
지난 7일 기준 미국과 이란 간 전쟁이 100일이 지났다. 전장에서는 위태로운 휴전을 이어가고 있다. 해상 물류망 붕괴로 세계 경제는 신음이 깊어진다. 무엇보다 뒤틀린 물류망이 언제, 어떻게 질서를 다시 회복할지 알 수 없다. 일각에서는 전쟁 이전과 같은 형태의 물류망은 이제 끝났다고 진단한다.
미국과 이란 간 무력 충돌은 단순한 지역 분쟁에 그치지 않는다. 전쟁이 시작되자 세계 원유 수송의 핵심 관문인 중동 해역은 순식간에 글로벌 공급망의 최대 위험지역으로 떠올랐다. 유조선 운항이 차질을 빚고 보험료와 운임이 급등하면서 에너지 시장은 물론 제조업과 물류산업 전반이 흔들렸다.
전문가들은 전쟁 그 자체보다 더 큰 변화가 종전 이후 나타날 것으로 전망한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수십 년간 유지돼 온 글로벌 공급망 질서가 근본적으로 재편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는 오랫동안 효율성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왔다. 원가는 가장 낮은 곳에서 생산하고, 가장 빠른 항로를 통해 운송하는 방식이 세계화 시대 표준이었다.
미국과 이란 간 충돌은 이 같은 공급망 모델의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특히 국제 물류 업계는 특정 지역에 지나치게 의존한 ‘초크포인트(Choke Point)’의 위험성을 다시 확인했다. 초크포인트는 세계 물동량이 집중적으로 통과하는 전략적 요충지를 의미한다. 대표적으로 호르무즈 해협, 수에즈 운하, 말라카 해협 등이다.
평소에는 가장 효율적인 통로이지만 분쟁이나 테러, 봉쇄가 발생하면 전 세계 물류 흐름을 마비시킬 수 있는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실제로 이번 전쟁 과정에서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자 국제 유가는 급등했다. 주요 해운사들은 운항 계획을 수정하거나 우회 항로를 검토해야 했다.
특히 이런 충격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산업연구원은 지난 4월 발표한 ‘미국-이란 분쟁과 글로벌 물류경로 재편 가능성’ 관련 보고서에서 “세계적 기업들은 전쟁을 계기로 공급망 전략 자체를 수정하기 시작했다”며 “과거에는 비용 절감이 최우선 목표였다면 이제는 안정성과 회복력이 더 중요한 가치로 떠오르고 있다”고 분석했다.
더불어 “저비용 드론·미사일 등 비대칭 무기의 확산으로 해상 초크포인트에 대한 공격이 기술적으로 비가역적인 추세로 전환됐고, 과거 효율성 중심으로 설계된 중앙집중형 에너지·물류 경로가 구조적 취약점으로 전환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세계 주요 제조기업들은 특정 국가나 특정 항로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공급망 다변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중국 중심 생산기지 체제에서 벗어나 동남아시아와 인도, 중남미 등으로 생산 거점을 분산하는 움직임도 확대되고 있다. 단순한 비용 경쟁력보다 지정학적 리스크 관리가 기업 경쟁력을 결정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한 유조선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韓, 대체 물류망 확보 국가적 과제
이번 사태는 국제정치 질서에도 적지 않은 균열을 남겼다. 특히 미국의 일방적이고 독자적인 군사행동은 전통적인 동맹국에도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겼다.
냉전 이후 미국은 국제 해상교통로의 안전을 보장하는 사실상의 ‘세계 경찰’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미국 우선주의 기조가 강화되면서 동맹국들 사이에서는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유럽이 대표적이다. 유럽연합(EU)은 에너지와 방위산업뿐 아니라 물류·공급망 분야에서도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논의를 본격화하고 있다.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자체 공급망을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수혜국으로 거론되는 곳이 중국이다. 중국은 이미 세계 최대 제조국이자 물류 인프라 강국으로 자리 잡았다. 일대일로(BRI) 사업을 통해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철도·항만 네트워크를 구축해 왔다. 최근에는 중동과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육상 물류망 확대에도 속도를 높이고 있다.
과거 글로벌 공급망이 미국 중심의 해상 네트워크에 의존했다면, 앞으로는 중국이 주도하는 육상·복합물류 네트워크의 영향력이 더욱 커질 수 있다. 실제로 유럽 기업들 사이에서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철도 물류망 활용 비중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하고 있다.
한국 역시 이러한 변화에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은 수출입 물동량의 약 98%를 해상운송에 의존하는 대표적인 무역국가다. 원유와 가스, 원자재 대부분을 해외에서 들여오고 완성품을 세계 시장으로 수출하는 구조인 만큼 해상 물류망 불안은 곧 국가 경제의 위험으로 직결된다.
그동안 한국의 물류정책은 효율성과 비용 절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공급망 안정성 확보가 핵심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에너지 수입선 다변화는 물론 전략물자의 비축 확대, 주요 항만 경쟁력 강화, 대체 물류망 확보 등이 국가 차원의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의 경쟁은 단순히 누가 더 많은 물건을 생산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안정적으로 공급망을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진단한다. 전쟁은 언젠가 끝난다. 그러나 전쟁이 남긴 공급망 재편의 파장은 종전 이후 훨씬 더 오랫동안 세계 경제를 흔들 가능성이 크다.
미국과 이란의 충돌은 단순한 군사적 사건이 아니라 글로벌 물류 질서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신호탄이다. 효율성 중심의 시대가 저물고 안정성과 전략적 자율성이 새로운 가치로 부상하는 가운데, 세계 각국은 지금 ‘포스트 전쟁 물류질서’라는 거대한 판의 변화 앞에 서 있다. 한국 역시 그 변화에 맞춘 새로운 국가 물류 전략을 서둘러 마련해야 할 시점이다.
산업연구원은 “과거 효율성 중심으로 관리해 온 에너지·물류 경로가 다각화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안보·경색 위험성까지 포함한 새로운 최적화를 정부와 기업에 요구하는 상황이 됐다”며 “다양한 해외 신시장 개척 전략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각자도생’ 우회로만이 살길…살아남는 자가 强者 [판 뒤집힌 물류망②]에서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