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판매금지' 피했지만…美 법원 "대마불사 보호막 없다"
입력 2026.05.22 10:59
수정 2026.05.22 11:15
美 법무부·특허청도 의견 낸 6100억 특허전
길스트랩 판사 "기업 규모는 면책 사유 아냐"
ⓒ해당 이미지는 AI로 제작됨.
삼성전자가 미국 특허소송에서 제기된 영구 금지명령 청구를 막아내며 한숨을 돌렸다. 다만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글로벌 대기업이라고 해서 금지명령을 피할 수 있는 보호막은 없다"고 적시하며 기업 규모 자체가 예외 사유는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6100억 배상으로 번진 특허 분쟁
21일 본지가 분석한 미국 법원 문서에 따르면 미국 텍사스 동부지방법원의 로드니 길스트랩 판사는 지난 17일 특허관리전문회사(NPE)인 콜리전 커뮤니케이션스(Collision Communications)가 삼성전자를 상대로 제기한 특허 영구 침해 금지 신청을 기각했다.
이 소송의 뿌리는 미국 방산업체 BAE 시스템즈가 개발한 무선 통신 간섭 감소 기술로 거슬러 올라간다. 혼잡한 통신 환경에서도 안정적인 연결을 보장하기 위해 군사용으로 개발된 이 기술을, 뉴햄프셔주 소재 소규모 기업 콜리전 커뮤니케이션스가 약 15년 전 상용화 목적으로 BAE로부터 특허를 매입했다. 콜리전은 해당 기술을 4G·5G 셀룰러 산업에 적용하는 사업을 추진하며 삼성전자와 협력 가능성을 타진했다.
법원 기록에 따르면 양사는 2011년부터 2014년까지 특허 포트폴리오를 둘러싸고 광범위한 파트너십·라이선스 협상을 진행했다. 그러나 협상은 결렬됐고 콜리전은 삼성이 유사한 기술을 자사 갤럭시 스마트폰·태블릿·노트북 등에 적용했다고 주장했다. 콜리전은 2023년 12월 12일 텍사스 동부지법에 소를 제기했다.
이 법원은 미국에서 손꼽히는 특허 소송의 메카로, 길스트랩 판사의 법정에서만 지난해 수억 달러대 특허 평결이 잇따라 나왔다.
지난해 10월 10일, 텍사스주 마셜 법원의 8인 배심원단은 삼성전자가 콜리전의 특허 4건을 고의로 침해했다고 만장일치로 평결했다. 배상액은 4억4549만4160달러(약 6100억원), 콜리전 측이 요구한 금액 그대로였다. 배상은 '러닝 로열티' 방식으로 구조화됐다. 삼성이 해당 기술을 계속 사용하면 미래 판매분에 대한 추가 배상 의무도 발생하는 구조다. 삼성은 재판에서 특허 무효와 독자 개발을 주장했고, 배상액도 1000만 달러 이하가 적당하다고 주장했지만 배심원단은 이를 모두 기각했다.
배심원 평결 이후 콜리전은 한발 더 나아갔다. 지난해 12월 10일, 4건의 특허 중 유효 기간이 남아 있는 특허에 대해 삼성의 추가 침해를 영구적으로 금지해달라는 신청을 법원에 냈다. 영구 금지령이 내려질 경우 해당 특허 기술이 탑재된 삼성 제품의 미국 내 판매와 수입에 차질이 발생할 수 있었다. 삼성 측은 미국 내 고용과 공급망 영향 등을 들어 금지명령이 초래할 파급효과를 강조했다.
ⓒ데일리안 DB
대기업도 금지명령 예외 없다
길스트랩 판사는 지난 11일 약 2시간에 걸친 구두 변론을 청취한 뒤, 이어 17일 최종 판결문을 내렸다. 판결의 핵심은 미국 대법원이 2006년 eBay 판결에서 정립한 '4요소 테스트'의 적용이다. 판사는 콜리전이 회복 불가능한 손해와 금전 배상의 불충분성 두 가지는 입증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양 당사자 간 부담의 형평성과 공익에 반하지 않는다는 요건 입증에는 실패했다며 금지 신청을 기각했다.
판결문에서 주목할 대목은 삼성이 전 세계 88개국에 조립 공장과 판매망을 두고 약 37만명을 고용한 글로벌 기업이라는 점을 내세운 논리를 다룬 부분이다. 길스트랩 판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시했다.
"삼성과 같은 글로벌 기업에게도 글로벌 금융권의 '대마불사(too big to fail)'라는 법적 보호막이 없듯이, '기업 규모가 너무 커 금지명령 대상이 될 수 없다(too big to be enjoined)'는 보호막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판사는 대기업이라는 이유만으로 금지명령 적용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다만 결과적으로 콜리전이 형평성 요건과 공익 요건을 구체적으로 입증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금지 신청 자체는 기각됐다.
판결문은 삼성뿐 아니라 콜리전의 논리도 비판했다. 판사는 콜리전에 대해서도 "모든 경우에 공익은 금지령을 지지한다"는 식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번 소송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미국 법무부(DOJ) 반독점국과 특허청(USPTO)이 '의견서'를 제출했다는 점이다. 두 기관은 지난 2월 27일 제출한 의견서에서 어느 당사자도 지지하지 않는다고 전제하면서도, NPE라는 이유만으로 금지령 청구 자격을 자동으로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법리를 제시했다. NPE도 특허 가치 산정의 어려움 등 일정 조건에서는 금지명령을 받을 수 있다는 취지다.
길스트랩 판사는 비실시기업(NPE)이라는 이유만으로 금지명령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다만 이번 사건에서는 형평성과 공익 요건이 충족되지 않았다고 봤다.
삼성 입장에서는 영구 금지령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했지만 부담은 여전히 남아 있다. 6100억원 배상 판결은 여전히 유효하고, 해당 특허를 계속 사용하는 한 추가 로열티 지급 의무도 살아있다. 삼성은 판결 직후 신규 재판을 요청하는 별도 신청을 제출한 바 있어 소송은 항소심 등을 통해 계속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