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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 받는 뇌, 침 한 대로 잠재울 수 있다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6.05.13 07:00
수정 2026.05.13 07:00

고은경희한의원 구로디지털단지점 이한별 원장.

“잠을 못 자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이유 없이 불안해요.”


요즘 진료실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있다. 많은 분들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라고 하면 전쟁터의 군인이나 극심한 사건사고를 겪은 특수직 종사자(경찰관, 소방관 등)의 질환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WHO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 성인의 70%가 일생에 한 번 이상 충격적인 외상 사건을 경험한다. 여기서 ‘외상’이란 전쟁이나 극심한 재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통사고, 이혼, 갑작스러운 사별, 직장 내 괴롭힘 같은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정신적 충격도 모두 PTSD를 유발할 수 있는 외상이다. 결국 누구나 어느 날 갑자기 PTSD를 겪게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정신건강의학과를 찾는다.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는 분명 도움이 되는 도구다. 그러나 약을 시작한 환자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약은 먹어야 한다는데,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라고 묻곤 한다.


체중 증가, 성기능 저하, 낮 동안의 무기력 같은 부작용, 무엇보다 끊기 어려운 의존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한의학에서는 예로부터 마음과 몸을 분리해서 보지 않았다. ‘동의보감’에서는 이런 상태를 ‘심허(心虛, 심장의 기가 약해져 두근거림과 불안이 생긴 상태)’와 ‘기울(氣鬱, 기의 흐름이 막혀 답답함과 우울감이 생긴 상태)’로 설명한다.


정신적 스트레스는 단순한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몸 전체의 기혈순환을 흔드는 사건이라는 관점이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는 약은 동시에 몸을 다스리는 약이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이 오래된 통찰이 최근 현대과학 논문을 통해 다시 조명받고 있다. 2026년 5월, 한국한의학연구원 김형준 박사와 경희대학교 함대현·이봄비 교수 공동연구팀이 국제학술지 ‘Animal Models and Experimental Medicine’에 발표한 논문이 그것이다.


연구팀은 PTSD 동물모델에서 정수리의 백회혈(百會穴, GV20)과 이마 한가운데의 인당혈(印堂穴, EX-HN3)에 전침 자극을 가했다. 그러자 삼차신경(trigeminal nerve, 얼굴 감각을 담당하는 신경)이 활성화되면서 뇌의 신경염증이 줄어들었고 무기력과 불안 행동은 감소했고 탐색 행동은 유의하게 늘어났다.


한마디로 ‘얼어붙은 뇌’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작용기전이 분자 수준에서 규명됐다는 사실이다. 전침은 뇌 염증의 핵심 조절 인자인 P2X7 수용체의 발현을 억제했고 염증성 사이토카인 생성과 뇌 면역세포의 과활성도 함께 낮췄다.


최근 정신의학계에서 우울증을 ‘뇌의 만성염증’ 관점에서 다시 보는 흐름이 있는데, 그 흐름과 정확히 맞닿는 결과다. ‘왜 침이 마음을 안정시키는가’라는 오랜 질문에, 이제 신경과학과 분자생물학이 답을 내놓기 시작한 셈이다.


임상에서도 이런 효과는 이미 활용되고 있다. 불면, 두근거림, 공황 증상으로 내원하는 환자에게는 백회·인당혈을 중심으로 신문(神門, 손목 안쪽 안정 혈자리), 내관(內關, 손목 위쪽 마음을 다스리는 혈자리)을 함께 자극한다.


처방으로는 심허에는 귀비탕(歸脾湯), 기울에는 시호가용골모려탕(柴胡加龍骨牡蠣湯)을 체질과 변증에 맞춰 사용하며, 약물치료를 받는 환자의 부작용을 줄이고 약 용량을 서서히 줄여가는 보완 치료로도 활용된다.

물론 침 치료가 약물치료를 완전히 대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중증 PTSD나 주요우울장애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약물치료와 심리상담이 우선이며, 한의 치료는 그 효과를 보강하고 부작용을 줄이는 보완재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최근 경희대병원이 소방공무원 정신건강 협력병원으로 지정되는 등 양한방 협진이 점차 자연스러워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진짜 위험한 건, 마음의 병을 ‘약 하나로 끝낼 문제’ 또는 ‘의지로 이겨낼 문제’로 둘로 가르는 단순한 이분법일지 모른다.


글/ 이한별 한의사·구로디지털단지 고은경희한의원 대표원장(lhb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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